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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시간 03 영화에서 배우다

영화 '여인의 향기'

by eunring

토요일 밤에는 습관처럼

잠시 잠깐 행복한 고민에 빠집니다

EBS 세계의 명화 때문이죠

말은 바로 하랬다고~

때문이 아니라 덕분입니다


마음이 당기는 영화일 때

보기 시작하면 끝까지 봐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다음날이 되니까요

어설프게 잠 시간을 놓치면

말똥말똥 하얀 밤과 마주하거나

다음 날 늦잠에 빠지게 되어 대략 난감~


어쨌거나 눈이 끌리고 마음이 당겨

단잠을 반납하고 본 영화

'여인의 향기'는 오래전 영화지만

띵작임이 분명합니다


탱고를 모른다는 여자에게

'스텝이 엉기면 그게 바로 탱고'라는

탱고 장면이 음악과 함께 눈에 선하고

프랭크 중령을 연기하는

알 파치노의 매력에 덥석~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인생 영화죠

눈먼 퇴역장교 프량크 중령 역에

몰입한 알 파치노는 실제로

실명 직전까지 갔다고 전해집니다


가난한 모범생 찰리(크리스 오도넬)는

크리스마스에 고향 갈 여비 마련을 위해

사고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까칠하고 괴팍한 퇴역 장교 프랭크를

연휴 동안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됩니다


삶에 대한 희망과 의미를 놓아버린 프랭크와

가난한 모범학생 찰리가 함께 뉴욕 여행 중

벌어지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고

주고받는 대사들이 인상적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여정을 통한

인생 공부인 거죠


최고급 호텔과 레스토랑과 리무진 등

가난한 학생 찰리에게는 모든 게

새롭고 각별한 인생의 경험인데

앞이 보이지 않지만

향기만으로 여자에 대해 짐작하는

프랭크의 특별한 능력에 놀라고

음식점에서 생전 처음 만난

도나(가브리엘 앤워)와 탱고를 추는 장면은

음악과 함께 손꼽히는 유명한 장면입니다


소파에서 쉬겠다며 프랭크가

아스피린과 시거를 사다 달라고

찰리를 내려보내지만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는 법~

찰리가 나가다 말고 다시 돌아와 보니

프랭크는 정복으로 갈아입고

스스로에게 총을 겨누려는 찰나~


뛰어들어가 말리는 찰리에게

프랭크가 소리칩니다

'네가 고통을 알아?

이 태평양을 건너온 농어 같은 자식아'

당황한 찰리는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총을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합니다

'장교는 자신의 총을 버리지 않으며

장교에게 총을 내놓으라는 건

항복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뭉크의 그림처럼 프랭크는 절규하죠


'항복이 아니니 총을 내려놓으라고

망가진 게 아니니 잠시 내려놓으라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그것이 인생'이라는 찰리에게

이제 난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묻는

프랭크의 절규가 안타깝습니다


'탱고를 추다가 스텝이 엉키면

그것이 탱고라고 다시 추면 된다'라는

찰리의 명답에도 여전히 찰리에게 총을 겨누며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대라는

프랭크에게 찰리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하는데요

'당신처럼 탱고를 잘 추고

페라리를 잘 모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우문현답입니다


프랭크가 총을 내려놓고

실타래처럼 엉킨 마음도 내려놓으며

중얼거리듯 부르는 노래가 애틋해요

'어디론가 가고 싶은 그런 마음 없으셨나요?

그러니 아직 머무르고 싶다는

그런 마음 아시겠죠'


여행에서 돌아온 모범생 찰리에게도

고달픈 인생의 막다른 벽이 버티고 있어요

학교 친구를 밀고하지 않으면

자신이 뒤집어써야 하는 상황이죠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열린 청문회에서

금수저 조지는 든든한 아버지와 함께인데

부모 없이 외로이 혼자 앉은 흙수저 찰리 곁에

프랭크라는 흑기사가 짠~ 등장합니다


'위기가 닥치면 누군가는 달아나고

누군가는 남는데

찰리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어느 누구도 팔지 않았고

그가 지금 선택한 길이 바른길이니

그가 계속 걸어가게 두라'고

멋지게 찰리를 위해 명변호를 하고

학생들의 기립박수를 받습니다

프랭크의 츤데레 매력이 돋보이죠


찰리의 일을 야무지게 해결한

프랭크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정치학 여교수의 향수를 알아맞히며

향수의 이름이 시냇가의 꽃이라는 의미라고

키는 174 적갈색 눈빛이 아름답다고

느긋하게 웃는 프랭크 곁에서 찰리도

함께 웃을 수 있는 여유로운 순간입니다


자신에게는 암흑밖에 남지 않았다며

절규하고 포효하던 그에게

아직 여인의 향기가 풍겨오니

다행입니다


집으로 들어가며

사이좋게 지내자고

자전거 타는 손녀에게 말을 건네고

손자에게 가방을 부탁하는 프랭크의 뒷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다가 차에 올라

찰리는 기숙사로 돌아갑니다


짧은 여정을 통해

서로를 돕고 서로에게 배우는

프랭크와 찰리 두 사람을 보며

세상 모든 사람이나 물건들은 저마다

자신의 자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느끼는

고단함과 암담함 속에도

한 줄기 희망의 향기가 잔잔히 흐를 테니

그 또한 다행입니다


잠을 포기하고

끝까지 보기를 참 잘했어요

향기로 여자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까칠한 매력쟁이 알 파치노처럼

Whooa~!!


제목은 '여인의 향기'지만

여인의 향기를 알아보고 느낄 줄 아는

고독한 상남자의 향기가

한참 동안 내 곁을 서성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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