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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May 10. 2018

천천히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서울의 속도를 외면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하여  오늘도 주문을 왼다.

“지난번에 맛있는 빵 줬었지? 맞지?” 

변기 수리 아저씨가 웃으셨습니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네, 아저씨. 우리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이군요. 주인집 사장님이 꼼꼼하게 절약을 하신 고로, 우리 집 변기는 엉덩이 통통한 사람은 끼기 딱 좋을 사이즈입니다. 일 년에 3번이나 막힌 게 제 탓은 아니란 소리죠. 


‘변기뚜러’ 사장님은 우리를 어떻게 기억하실지 궁금하다. 그 난리에 크레페 굽고 캔들 켜는 약간 이상한 부부...


     

그와 처음 한집에 살기 시작한 재작년, 첫눈 오던 날이 아저씨와의 첫 조우였지요. 

“첫눈이 오면 크레페를 구워야지.” 

남편은 노래를 부르고 바닐라 에센스 향기가 집안을 따스하게 채우고 창밖엔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그리고 변기도 막혔습니다. 옷걸이와 뚜러펑으로 시도해 보다가 낙담해서 ‘변기뚜러’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저씨이이이! 퇴근 안 하셨죠? 제발 제발 와 주세요!” 

“응. 돈 주면야 어디든 가지!”      


우리집 문 여신지 정확히 10초 만에 뻥! ‘마포구에 변비 환자들이 많은지 변기 막힌 집이 많아서’ 점심도 못 챙기셨다는 아저씨. 크레페 2개를 10초 만에 완식하신 아저씨. 접시와 나이프는 냉정하게 거절하셨죠. 

“앉아서는 못 먹어. 한 집 당 오만원이야. 앉아서는 못 먹지.” 


‘앉아서 밥 먹는 자, 돈을 못 모은다’는 러시아 속담도 있지요(네, 제가 만들었어요) 격언이 귓가를 때리며, 아저씨와 남편의 시간 개념이 명징하게 대조되는 순간이었죠.

“변기를 큰 거로 바꿔야겠어. 그럼 집주인만 이득인가?” 머리 터지겠는 저. 그리고 완벽한 크레페 모양을 보고 흐뭇해하는 그. 모기향만큼 약한 불에 살며시 구워야 얇고 예쁘고 식감은 가벼운 크레페가 완성된다고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나, 안 물어봤는데...


변기는 좀 잊고 심리적 안정을 꾀하고자 곳곳에 켜둔 플로랄 향초, 그 향기 사이로 프라이팬 앞에 고요히 서 있던 남편의 수도승같던 뒷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말했어요. 고승의 가르침처럼 들렸어요.  

“지금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어요. 걱정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런데 왜 걱정하지요?”      

프랑스 가정집의 크레페. 레몬즙과 설탕가루를 뿌리거나 꿀, 잼 정도만 발라 본연의 맛과 텍스처를 즐긴다.


누텔라와 생크림을 얹은 크레페 사진을 보면 악몽을 꾸는 것 같다는 그. 파리 관광객용 음식이란다.


프랑스에서 이제 갈까?”는 디저트 주문할까?”

세계에서 제일 서두르는 사람들의 나라는 어디일까요? 대번에 ‘대한민국!’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해서 머리를 굴려 봐도 다른 나라가 떠오르지 않아요. 반면 ‘프랑스+느리다’를 검색해 보세요. 느린 행정, 느린 인터넷 속도, 느린 택배에 당황한 한국 유학생들의 포스팅이 나옵니다. 두 나라가 정말, 정말 다르거든요.      

시간 개념이 극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자란 개인이 한 팀으로 속도를 조율하는 게 쉬우면 이상하죠. 일단은, 남편이 한국에서 ‘빨리빨리’를 학습 중입니다. 홈파티를 하던 밤. “늦었네. 빨리 가자!”하자마자 순식간에 집이 텅 비었을 때 에스프레소 더 뽑으러 주방에 갔던 남편의 그 황망한 표정을 잊을 수 없네요.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이제 갈까?’ 하는 건 커피와 디저트 시키자는 의미야. ‘가자!’ 하고 나서 1시간 더 수다를 떠니까.”     


바티: "아직 먹고 있는데...자꾸 친구들이 사라져요."


프랑스 시댁 새해 파티에 갔을 때 가족 친지와 굿바이로 비쥬를 할 때 1시간 넘게 걸렸던 게 떠오르네요. 이런 순서입니다.      


1 나란히 섭니다

2 내 차례가 오면 10년 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오!’ 하고 반가움을 표현해요 

3 양 볼을 2-3번 번갈아 맞대며 허공에 ‘쪽’ 소리를 내요  

4 ‘1월 1일로 넘어갈 때의 종소리를 너와 들어서 뜻 깊었고, 내년에도 새해를 함께 보내길 기원하며, 어제 네가 만든 김밥과 불고기가 정말 맛있었으며, 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귀중한 사람이고, 한국에 가서도 이 아름다웠던 시간을 반드시 기억하기를 바람’ 등의 덕담을 들어요. 이에 답해서 나도 덕담을 해요.(지면상 생략할게요)

5 1-4를 모든 사람과 성심성의껏 합니다

* 덕담이 복사 붙여넣기하듯 다 똑같으면 재미없음. 상대에 따라 각각 다르게 하는 게 옳아요.     



메르켈과 마크롱 


강경화 장관님도 쬭~ 


굿바이 비쥬 때마다 우리는 제 친척들과의 헤어짐을 떠올렸어요. 달리는 택시 안으로 만원 몇 장 던져 넣으며, 약간 성을 내듯이 소리치는 게 포.인.트.  

“이게 뭐야! 아유! 네가 돈이 어딨어!” (속뜻을 읽어야 함. 돈 없다고 무시하는 게 아님)

“됐어! 됐어! 아저씨, 빨리 가 주세요!” (오늘 처음 본 기사님이지만...기사님도 그러려니 하심)     


액션물 같지 않나요? 스릴 넘치죠. 운 나쁘면 지폐가 도로에 팔팔 날리기도 하고요. 그럼 내려서 줍는 민망한 상황도 생깁니다. 싸우듯, 좀 후려치듯 말하지만 이게 우리 식 덕담이겠거니, 아름다운 헤어짐이겠거니 합니다. “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란다” “너와 함께 명절을 보내서 진심으로 행복했어” 같은 말은 낯 간지러워 못하지만, 

서로에게 지폐를 뿌리는 이 참된 애정. 


이렇게 찬찬히 보아야 알 수 있는, 은은히 정 깊은 어른들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한참 웃곤 합니다. 

 “양국 어른들 표현방식이 너무 다르다”

“속마음은 다 똑같지. 사랑이잖아.”     


천천히그러나 제대로 살기 위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이 대도시의 속도가 우리 둘의 속도에는 좀 벅차요. 입버릇처럼 하는 ‘빨리빨리’도 어지러워요. 언어 습관이 문화를 말해주는 거니까요. 빨리빨리를 많이 들으면 덩달아 조급해져요. 짬뽕 배달시킬 때도 의례히 “빨리 갖다 주세요.” 짬뽕 너무 뜨거운데 “식기 전에 빨리 먹어.” 

기자 선배는 제게 원고 의뢰를 할 때 이렇게 말하곤 자신도 웃더군요. “천천히, 빨리 줘.”      


빨리빨리의 나라에서 프리랜서로 ‘손이 빠르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노력하다가 저는 고혈압, 천식, 신우신염을 차례로 앓았어요. 남편 속도에 맞춰 ‘느리게 살기’를 실천하면서부터였죠. 애들 봄방학에 한차례 앓곤 하잖아요. 빡센 겨울 잘 겪어내고 나서요. 


하긴, 초등학교 때는 점심시간 1시간이 짧아서 늘 밥을 반절 남겨와 엄마를 걱정시키던 아이였는데. 나라밖으로 도망갈 순 없으니까, 그래도 여기 속도에 나를 맞춰 살아 보려고 아등바등하다가 삐끗했다고 여기며, 아주 열심히 앓았습니다.      


“이런 말 누가 써. 완전 옛날 말이야”라고 그는 말했지만. 뭐 어때요. 내가 좋은데!

프랑스 사람들은 ‘느리게’ 혹은 ‘천천히’란 의미를 담은 단어를 많이 씁니다. 저는 알라빠빠(a la papa: 천천히, 한가롭게)란 단어를 사랑해요. 알라빠빠, 알라빠빠...눈 감고 외우면 서울의 속도를 외면할 수 있는 힘이 고이는 것 같아서요. ‘Lentement mais surement’란 말도 좋아해요. ‘느리더라도 확실하게’란 뜻이래요.마음이 조급할 때 스스로 다독이는 용도로도 쓴대요. 



“열심히 해봐야 어차피 클라이언트가 맘대로 수정 시킬 텐데 뭐.”하며 ‘빨리빨리 대충대충 ’ 넘기는 습관이 내게도 있다.



조금 느리더라도 이왕 할 때 제대로, 천천히 하면 다음에 수정하고 또 수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렁뜨멍 메 쉬흐멍’ 정도의 발음이지만, 좀 어려워서 저는 ‘렌테멘테 수레멘테!’라고 멋대로 씁니다. 남편 속도에 속이 터져 또 트럼프처럼 분노하게 될 때마다 외웁니다. 렌테멘테 수레멘테!   숨가쁜 서울의 속도에 현기증이 일 때마다 주문을 외웁니다. 

좀 천천히 해도 큰일 나지 않아, 올바른 방향으로만 가면 결국엔 괜찮아져, 
주변 사람의 속도에 조바심 내봤자 약값만 더 든다.



두 개의 다른 세계가 만나 수없이 스스로를 부수며 결국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 결혼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국적이 다르다면, 그 과정이 더 다이내믹한 것이겠고요. 30년 넘게 몸에 밴 속도니까 서로가 얼추 비슷해지려면 30년은 더 걸리는 게 당연지사.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어쩌면 제가 그보다 더 느리고 한가로워질까요? 뭐 어떻게든 되겠죠.                




프코부부 

글과 사진: 김은성 / 드로잉: 바티 

어느 나라 말로 부르건 들은 척도 안하는 고양이 미코와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국제부부의 생생한 삶을 담은 다큐 에세이를 써볼게요. 


매주 화요일 <더 퍼스트 미디어>에도 연재됩니다. 

(이번주 연재 http://www.thefirstmedia.net/news/articleView.html?idxno=42890)


purplewat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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