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도 향하지 못하는 공격성을 정확한 명사로 바꾸는 일
“발바닥 밑의 상처까지 후벼 파올리는 게 얼마나 어렵니?”
내가 받고 있는 심리상담에 대해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카페에서 엄마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감정이 건드려졌다. 불편한 기분이 들면 언어로 기분을 정리해 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킨 뒤 차가워진 머리로 찬찬히 짚어보았다.
나는 이제 한국의 부모 세대가 자녀에 대해 ‘가엾음’ ‘안쓰러움’ ‘불쌍함’ 등으로 대응하는 것에 면역이 생긴 것 같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흔한 감정 대응방식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자식은 평생의 상처요 언제나 아픈 손가락이다. 그러므로 그 부분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다만 ‘후비다’ ‘파올리다’ ‘발바닥’ 같은 단어의 사용이 거슬렸다.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의 상처를 꺼내 말한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진데, 내게는 그 모든 단어가 설었다.
나는 이런 식의 ‘언어의 다운그레이드’를 몹시 불편해한다. 지난 시간의 고통의 나의 서사로 정리해 보려는 노력은, 엄마가 건넨 언어의 옷을 입었다. 문득 그 시간들에 ‘지긋지긋하고 징글징글하고 피딱지가 앉은 것처럼’ 느껴진다. 나의 선택으로 내가 겪어내고 있는 귀중한 시간이 순식간에 '한 많은 내 인생'으로 변모한 느낌이었다면 지나칠까? 인생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면 과장일까?
의문이 들면 상대에게 이유를 질문해 보는 게 최고다.
“왜 ‘후비다’ ‘파올리다’라고 말해?”
엄마는 겸연쩍게 웃었다.
“그러게.내가 왜 그렇게 말했지? 몰라. 그게 익숙해.”
익숙해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 외에 다른 방식을 모르거나 또는 알아도 사용하기 싶지 않다는 뜻과 같을까. 내가 아는 우리나라의 장노년 세대 중에는 이런 식의 표현법에 익숙한 분들이 많았다. 현상을 정확하게 직시하기보다는 그저 강도를 높여 '느낌적 느낌'을 전하고자 하는 방법들. 그게 쉽고 편리한가? 정확한 명사와 형용사를 사용하는 대신, 접두사나 접미사, 부사를 사용해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잦다. 그러면 안전하게 느껴지나?
글쓰기 수업에서 어떤 중장년 여성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한탄할 때 이런 방식을 쓰곤 했다.
남편이 내 마음을 후벼팠네.
그 인간이 내 인생을 짓이겨놨지.
우리 집안을 들쑤시지 마라.
그 얘기라면 아주 징글징글해.
‘시 자’라 하면 아주 지긋지긋
내 심정을 까뒤집어 보여주고 싶다.
시퍼렇게 젊은 게 아주 나한테 까불더라구!
그저 강도를 세게 높이고자 할 뿐, 어디에도 이르지 못한 감정 표현이다. 물론 감정표현을 처음 시작할 때, ‘쉽게 시작하기’로는 이런 '날것'같은 감정표현이 괜찮다. 쉽고 익숙하니까. 감정 표현에 있어 더 나아가고자 하는 장기 계획이 있다면, 시작할 때는 이런 표현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글쓰기 강사로서 나는 수강생들이 이곳에서 더 먼곳으로 도달해 보기를 바란다.
이런 형태의 언어표현은 ‘공격성의 소극적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단순히 어휘력 부족일 경우도 많다. 노랗다라고 말할 것을 아무 생각없이 ‘싯누렇다’고 하는 경우도 봤다)
남편이 나를 모욕하고
그 사람이 내 인생을 파괴했고
나는 시부모를 증오하며
내가 정확히 이해받기를 소원하며
나는 무시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존중받기를 원한다.
라고 말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자를 말할 때 누군가는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무엇을 원한다고 말할 때는,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아 걱정스러워요. 하지만 좀 설레네요."
누군가는 "모욕이나 파괴 같은 단어를 쓰면 너무 '정머리'없는 것 같고 똑똑한 척 하는 것 같아요. 너무 딱딱하지 않나?" 라고 말했다.
또 누군가는 "시부모를 '증오'하는 것 까지는 아닌 것 같고...그런데 사실 죽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내 팔자가 편할텐데!" 라고 말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아, 배가 간질간질해요. 뭐랄까, 온몸이 막 터질 것 같아요. 이런 말 수업에서 해도 되나요."
수강생의 연령대나 처한 환경에 따라 반응은 각자 달랐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적합한 단어를 모르면, 단어의 강도를 높이고 싶어진다. 주장하는 글쓰기를 효과적으로 못할 때 느낌표를 많이 쓰고, 문장의 구조를 매끄럽게 하지 못할 때 쉼표를 남발하고 싶어지듯이. 마음은 넘치는데 효과적인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닐지.
한번은 엄마가 자신의 시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아주 어려운 분이셨어. 내가 좀 만만하게 보여서...그분은 아주 호랑이 같은 분이어서, 아주 보통 분이 아니어서..그냥 매일 나를 들었다 놨다...그때 내가 몸과 맘이 자근자근 짓이겨져서...”
한국어를 잘 모르는 외국인 남편에게 이 문장을 통역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분, 들었다 놨다, 자근자근, 짓이겨지다.....를 외면하고, 상황을 정확히 지칭하는 명사를 찾았다.
“엄마에게 아주 모욕적인 상황이었다”고 대화를 시작했다. 가부장제, 가스라이팅, 모욕, 노예 취급 같은 영어단어로 상황을 재서술했다. 상대는 아주 쉽게 상황을 이해했다.
한국 사회는 아직 결코 관용적이거나 통합적이지 못하다. 누군가의 무례와 배타적인 태도가 누군가에게 분노와 억울함,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아주 흔하다. 그런 사회 안에서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분노가 밖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일이 많다. 타인에 대한 공격성이 아니라 자기파괴, 자기혐오로 둔갑하는 것이다. 감정을 정확한 언어로 바꾸는 연습을 하면 나아진다. 자신을 파괴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다만 이 언어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배워야 한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