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트레이닝: 앞에 앉은 사람을 (말로) 드로잉하기
당신이 10초 이상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무런 말 없이. 나는 사랑하는 사람 두셋을 손으로 꼽다가 그만 두었다. 이런 이상한 일이 서글퍼서 이런 이상한 직업을 가졌을까. 연인이나 아이에게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당신의 사랑을 몹시 이해하고 있으므로 오늘따라 당신의 사랑이 별꽃처럼 튀어 오르는 날이 아닐지 그저 짐작할 것이다. “내가 예뻐서 죽겠냐”며 장난스레 웃어준다면, 우리는 서로를 더 오래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꿈꾸는 우주다. 바라마지 않는 작은 방이다. 글과 말로 나를 표현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피로하다. 언어로 완벽하게 소통하려는 애달픔 없이, 그 애달픔이 오해되는 비극 없이. 그저 바라보는 행위만으로 우리의 마음이 완전하게 전달되는 우주.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그런 이상을 꿈꾸며 오늘도 글쓰기에 대해 쓰고 있다.
내가 누군가를 말없이 오래 바라봐도 용인되던 시절은 유년기에 두고 왔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일이 순수의 세계로 돌아가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자. 등굣길에 담벼락의 들꽃을 오래 바라보다 지각하던 일이 즐거웠다면 다시 그렇게 해 보기로 한다. 다행히도 이 일은 작가의 업무나 다름없다.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은 채 바라보는 일은 글쓰는 사람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이다. (컴퓨터 앞에 앉기 전에 대상과 현상을 한참 바라보는 게 글쓰기 작업 프로세스 중 하나니까)
이렇게 바라볼 때, 마땅히 그렇게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고정관념은 벗어두어야 한다. 할 수 있다면 나의 직업과 성별, 사회와 가정에서의 역할도 잠시 내려놓자. 그건 너무 많이 했고 지쳤다. 오직 '나로서' 관찰하고 묘사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에세이나 르포 기사 같은 논픽션 글쓰기 뿐 아니라 시와 소설, 희곡을 쓴다 해도, 책상에 앉기 전에 세상과 사람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필수적이다. 눈을 감고는 무엇도 쓸 수가 없다.
워크숍 첫날에는 ‘드로잉하듯 말하기’를 한다. 앞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을 10초 이상 가만히 바라본 뒤, 그를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온몸과 색깔과 모양과 각도, 웃거나 찡그릴 때의 표정, 눈빛의 흔들림, 심지어 몸에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까지 세세히 말하도록 유도한다. 상대의 맨투맨 티셔츠에 수놓은 사슴 로고의 눈망울이 밤색인지 오렌지색인지까지 발견하고 나면, 어쩐지 편안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왜일까?
강의할 때 쉴새 없이 양손을 움직이는 나를 묘사하며 “파란 색의 스웨터는 소매가 나팔꽃 모양으로 팔락거린다. 그의 손동작은 판토마임을 하는 희비극 배우 같다. 머릿 속에 떠오르는 것을 타인에게 전하려는 표현의 욕구가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다.”고 누군가 책 속의 문장처럼 멋지게 묘사해 주었을 때는 고맙고도 쑥스러웠다. (묘사 대상이 되는 수강생들의 부끄러운 기분을 좀 알겠더라) 처음엔 일종의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시작한 것인데 “민망해서 못하겠어요!”를 외치면서도 몹시 즐거워하는 수강생들 덕에 고정 프로그램이 되었다. 웃기고 어색하지만, 집중력이 한껏 높아져서 기분이 좋아진다.
한번은 상대를 보고 “붉은 장미꽃 같은 미인이십니다.”라고 말하신 분이 있었다. 은유를 가져오기 전에, 내 눈에 보이는 것을 소박하게 먼저 말해 보자고 권했다. 성급한 은유는 나의 감각들이 진짜로 느끼기 전에 가로막아 버린다. 물론 독자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미인’이란 표현도 쓰지 말자고 했다. 멋지다, 아름답다 같은 표현도 이 트레이닝에서는 금지된다.
쓰고 있던 마음의 안경을 벗는 것이 이 트레이닝의 학습목표 중 하나다. 판단과 평가 이전에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를 맡는 게 우선이다. 멋진 표현을 만들기 전에 잘 보는 것이 먼저다. 그분은 60대 남성 수강생이었는데 내 지도에 순조롭게 잘 따라와주었다. 눈을 자주 깜빡이는지 아닌지, 웃을 때 소리를 내는지 눈만 웃는지, 머리칼은 몸에 어디에 닿아있는지 살펴보자고 했다. 부끄러워 하면서도 찬찬히 ‘드로잉’하기 시작했다.
“눈이...한국인 평균보다는 갈색이 많이 도는 것 같아요. 웃을 때 하하하? 헤헤헤? 같은 소리가 납니다. 또....눈 밑에 작은 우물이 패입니다. 와, 신기하네요. 보통은 뺨에 보조개가 패이잖아요."
그분은 놀라운 발견을 한 것처럼 흥미로워했다.
나는 이 묘사가 참 좋았다. 어린이처럼 정직하고 구체적인 말하기였다.
이 ‘드로잉’을 할 때는 정확도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잘 한 묘사인지 아닌지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 본대로 말하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발견한다. 세상과 사물과 사람을 실제로 만지듯이, 안경테의 각도, 머리카락 끝의 물결침, 듣기에 집중할 때 들리는 턱의 모양...그것들의 윤곽을 따라 그리듯이 한다.
사람들이 간직한 아름다움이 실타래처럼 부드럽게 풀려나온다. 비슷비슷해 보였던 사람들이 각자의 다름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대충 보며 살고 있는지 깨닫고 놀라기도 한다. "낡은 집인 줄만 알았는데, 창문의 문양이 정말 고풍스러워요!" "웃을 때마다 고개를 잘게 흔드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요." "흰 부분이 하나도 없이 짧게 자른 손톱이 인상적이에요."
많은 학생들이 이 액티비티를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단순히 바라본 것을 기록하는(말하는) 과정에서 글로 쓰고 싶은 대상을 오래, 깊이 있게 바라보는 트레이닝이 되었다고 전해왔다. 섣불리 평가하고 단정짓고 과장하는 습관을 고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하와이의 바다물결과 발리의 바다물결은 어떻게 다른지, 묘사할 수 있게 된다. 설악산의 아침빛과 지리산의 아침빛의 차이는 무엇인지 쓰게 된다. 글쓰기에 필요한 것은 시간과 집중력이란 것도 느끼게 된다. 무엇이든 오래 바라보면 그것은 글이 된다.
한번은 대학의 글쓰기 특강에서 이 액티비티를 했다. 존대말을 깎듯이 쓰는 선배가 어려웠던지 "미인이십니다." 하고는 '못하겠어요!'하던 학생들은결국 상대의 흰 피부의 온도가 낮아보인다든가, 웃을 때 '크'하는 소리가 난다는 표현을 하고는 기쁜 듯 또 '하이텐션'이 되었다. 마치 금지된 것을 말했다는 듯.
수업을 마칠 때 한 남학생이 불편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어서 주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사람의 코가 낮다고 묘사하면 욕이잖아요! 사람의 단점을 캐내는 것이잖아요?”
나는 답했다.
“그런 마음이 들어 불편하면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낮다’고 말하지 말고, 코의 끝이 둥근지 뾰족한지 색이 어떤지 말하면 되지 않을까요? 게다가 저는 코가 낮고 얼굴이 크고 키가 작고 발이 크고 머리칼이 건조한데요. 한국 평균보다 그렇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고, 그 점들이 제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