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언어로부터의 탈주-2

감정을 낯선 외국어로 해체하고 재정의하기

by 소은성

모국어에는 사용자의 기쁨과 슬픔의 기억이 모두 붙어 있다. 태어나서 성장하며 지나온 무수한 시간만큼의 무수한 기억과 감정이 찰싹 붙어있는 나의 모국어. 그것은 종종 자유로운 감정표현을 저해했다. 스스로에게 감정을 물을 때, 한국어 사용자로서의 나는 지나치게 능숙했다. 은폐와 조작에 능했다.


지저분한 낙서로 뒤덮인 벽으로 느껴질 때조차 있었다. 내가 아는 수많은 감정 단어들이 벽돌 같은 사전이 되어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떤 말을 뱉어도 상투적으로 느껴지거나, 때로는 이미 겪은 전생의 기억 같거나. 영화의 한 장면을 따라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우울의 시작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 환멸을 느끼는 순간과 닮았다.



새로운 언어를 만나게 된 순간은 나만의 작은 혁명 같았다. 특히 외국어로 내 마음에 대해 더듬더듬 말할 때. 그때 만난 연인의 프랑스어와 나의 한국어 사이에서, 우리는 양쪽 모두에게 서툰 영어로 등불없이 밤길을 걷듯 대화를 나눴다. 당시의 나는 감정의 거친 웨이브 위에 놓여있었다. 가끔은 이불을 치며 오열할 정도로.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동안,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의 상처들이 자꾸 헤집어졌다. 부은 눈을 한 연인에게 상대는 자주 물었다.


왜 울었어요. 마음이 어떻게 아팠어요. 그럼 무엇을 하고 싶어요.


고마운 대화 상대였다.


한국어와 달리 돌려 말할 방도가 없던 것, 가용 단어의 자원이 부족했던 것, 능숙한 한국어 스킬 안에서 자유자재로 감정을 숨길 수가 없던 것은 돌아보니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상대에게도 영어는 모국어가 아니었다. 수를 쓰다간 관계는 대번에 망가질 터였다. 종종 내가 하던대로 감정을 배배 꼬아 말하면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아 대화는 중단되었다. 공기가 자욱해졌다. 모국어는 자주 감정을 속인다. 어른스럽게 자신을 가장해 말할 수 있는 한국어 대신 유아 수준의 외국어로 말할 때, 감정들은 오히려 하나씩 천천히 펼쳐졌다.




이미 아는 단어를 해체하고 재정의하기

감정의 이름을 영어로 모르니 사전을 찾아야 했다. 한국어의 ‘답답해’와 ‘짜증나’를 영어로 찾아보았으나, 그 단어들은 어쩐지 내 것 같지 않았다. 영어 선생님을 붙잡고 물어보니 다른 한국인들도 자주 느끼는 어려움이라고 했다. 서럽다, 억울하다, 짜증난다, 답답하다처럼, 영어단어로 치환해 사용할 때 어딘지 좀 부족한 느낌이 드는 한국어 감정 단어들이 낯설게 보였다. 익숙한 그 단어들이아주 많은 욕구를 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울하다’를 대체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국어사전에서 ‘억울하다’의 정의는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하다’ 정도다. 한국어 정의도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정의한 나의 ‘억울하다’는 “나는 더 나은 대접이나 보상을 받을 권리와 자격이 있다” 정도였다. 그래서 앞으로는 ‘억울하다’ 대신 그렇게 말하기로 했다. 일종의 번역투처럼, '나는 그런 대접을 받지 않았어야 했어' 처럼 조금 어색하고 아주 길게, 그리고 명료하게.


한번은 “괜찮아. 나는 괜찮아.” 하며 오열하다가 “정말 괜찮아요?”란 물음에 이렇게 말했다. “아니오. 나는 나를 싫어해요. 정확히는 지금의 내가 싫어요.”


한번은 취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릴 적에 나는 매일 춤을 추고 싶었어

다른 가족의 기분은 신경쓰지 않고.

눈치없이 행복하게.

나는 음악과 즐거운 기분을 모두 사랑하거든.

나는 행복한 무드를 정말 좋아해.”


"그러면 왜 춤을 추지 않았어?"


‘눈치가 보여서. 분위기 깨는 것 같아서. 혼자만 행복하면 이기적인 것 같아서’

같은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어서 대충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다.


그곳은 내가 머물고 싶은 장소가 아니었어, 그건 내가 느끼고 싶은 감정이 아니었어. 나는 그런 긴장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서툰 외국어로 더듬더듬 말하며 이상한 자유를 느꼈다.


당시에는 3-4가지 정도의 질환이 겹쳐 발병하는 바람에 늘 어지러웠다. 어지러운 몸으로 정신의 명료함을 원했다. 내 귀에 들리도록 소리내어 말해야만 사고할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서러운가. 답답한가. 짜증나는가. 억울한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 아니었다.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감정을 느낀다. 서럽고 억울해, 라고 말해보니 불편감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머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길을 걸으며 혼자 영어로 질문하고 대답했다. 감정을 가능한 추상보다는 구체적으로 포착했다. (일종의 영어공부였다) 화보다는 배신감, 슬픔보다는 상실감. 서러움을 대체할 내 단어를 찾고 싶어서 애를 썼다. 내 감정은 ‘분노’에 가까웠다. ‘더 많은 자유를 원한다’에 가까웠다.


나는 무례할 자유, 화를 자유자재로 표현할 자유를 원했다.


감정의 세세한 결을 알기 어려우면 차라리 욕구를 물어보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what do you want?

너는 무엇을 원하니?

아니, 해야 하는 것과 필요한 것 말고.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냐고?


한번도 아이처럼 말해보지 못했던 나는 이제야 아이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아아, 내가 사랑하는 과도한 대명사의 나열. 나는, 나를, 나에게, 내가, 나의 것.


나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나는 나를 더 키우고 싶어.

아직 제대로 자라지 못했으니까.


나를 영어 학원에 보내자.

나를 비행기에 태워 좋은 곳에 날려 보내자.

나에게 좋은 것을 듬뿍 먹이자.

나를 많이 재우자.


그토록 풍요한 사랑을 나에게 주고 싶어.

흘러서 넘쳐 버리도록.


나쁜 감정들은 밀물처럼 보통 한번에 몰려온다. 당신은 파도에 떠밀려 쓰러진다. 여러 가지 감정에 압도되어 버린다. 만약에 당신이 감정들을 한 번에 하나씩 느낄 수 있다면 어떨까. 하나 정도는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좋아하는 친구와 같은 회사에 지원했는데 친구는 합격하고 나는 낙방했다면, 노력에 대한 허탈함,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 미래에 대한 불안감, 친구에 대한 질투, 하지만 좋아하는 친구의 기쁨을 축하해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 같은 스터디원들에게 드는 부끄러움, 자신의 지능과 근면에 대한 무력감 등이 모두 뒤섞여있을 때 도무지 일어설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럴 때 아기같은, 또는 영원히 내 살갗처럼은 느껴질 수 없는 외국어로 감정을 설명하는 것은 의미있다. 약간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상충되는 감정들은 한번에 하나씩 경험될지 모른다. 과거의 감정과 기억에 달라붙어있지 않은 외국어 단어들은 자신을 원거리에서 바라볼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한국어가 나의 살갗이라면, 후천적으로 학습해서 사용하게 된 외국어는 나의 옷이다. 살갗이 아니라 옷이므로, 자주 구겨지며 종종 세탁과 다림질을 해야 하며 가끔은 몹시 어색하기도 하다. 하지만 익숙했던 나를 완전히 새롭게 보이도록 만들기도 한다. 기분이 저조할 때 늘 꺼내입는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처럼, 나는 외국어를 사용해 기분을 고조시키기도 한다.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갈 때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많은 보고서에서 "다중언어 사용자들이 그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할 때 다른 존재인 것처럼 느낀다.” 고 말한다.


익숙한 언어로 이뤄진 땅을 벗어나 기꺼이 낯선 외국어의 파도에 자신을 내던진, 먼곳의 작가들을 바라본다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스위스로 망명해 (모국어인 헝가리어 대신) 프랑스어로 작품활동을 한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대표적이다. 새로운 자아를 만나고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익숙한 영어를 버리고 이탈리어를 새로 배워 소설을 쓴 줌파 라히리의 선택은 보다 자발적이었다.라히리는 '창작에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어서'라는 이유를 들어, 작가로서의 매너리즘을 피하고 새로운 자극을 얻는 방법으로 타국의 언어를 선택했다. 그는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인생이며, 문법과 구문이 당신을 새로운 감정으로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비단 글쓰기 뿐일까. 쓰고 말하고 살아가는 모든 길에서, 안락함에서 벗어나 다른 '언어'의 중심으로 풍덩 뛰어드는 것. 그 용기는 감정과 자아의 경계에서 벗어나는 더 큰 용기로 확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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