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청중의 중요성

아무도 당신의 고백을 비웃지 않는 곳

by 소은성

여성전용 글쓰기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다. ‘여성전용이라니, 역차별!’ 이라는 웃기지 않은 농담을 듣고 황당해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 나에게 여성을 위한 글쓰기 수업은 자연스러운 정체성이 됐다.


지난 일기를 들춰 볼 때마다 웃게 된다. 대부분의 올바른 선택은 고심이 아니라 충동에 의해 해 왔다는 사실에. 기관이나 기업에서의 외부출강이 아닌, 내 공간에서 하는 소규모 글쓰기 워크숍을 기획하면서 수강신청 공지에 ‘여성전용’ 네 글자를 넣던 때도 그랬다. 내가 사랑하는 여성작가들의 텍스트를 맘껏 활용하자고 작심했었다. 록산 게이와 리베카 솔닛과 정세랑과 황정은을, 박완서와 박민정과 최은영과 이진송을 수강생들과 함께 읽는 순간을 상상하면 행복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수강신청 카톡에 남자 이름이 떴다. (그렇다고 확신했다)


곤란함은 당혹감으로, 이내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해!' 그동안의 글쓰기 수업에는 여남의 비율이 9:1 정도였다. 전원이 여성인 경우도 흔했다. 너무 당연하게도 여성 수강생들만 상상하며 커리큘럼을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미리 준비해 둔 글쓰기 워크숍 읽기자료 중에는 <나쁜 페미니스트>로 잘 알려진 록산 게이의 자전적 에세이집 <헝거>가 있었다. 발췌한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록산 게이는 어느 여행에서 비행기의 비상구열 창가 좌석에 앉는다. 그 좌석에는 팔걸이가 없어서 그녀는 비교적 편하게 앉을 수 있다. 그런데 옆자리 노인이 말한다. "여기 앉으면 비상 상황에 사람들 도와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 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는 비행기 내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울리는 목소리로 승무원에게 자신의 좌석을 바꿔 달라고 요청한다. 그녀는 당시의 감정을 이렇게 서술한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나는 내 자리에 되도록 몸을 웅크리고, 최대한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최대한 조용히 울었다.”


록산 게이는 이 일화를 통해 말한다. 당신이 뚱뚱한 사람이고 여행을 해야 한다면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못마땅해 하는 눈초리가 당신을 따라다닌다. 몸이 커지는 것만큼 당신의 세계는 좁아진다.


나는 이 글을 한 기관에서의 글쓰기 수업에서 사용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내가 어떤 스타일의 수업을 하는지 모르고 신청한 사람이 많았다) 읽는 내내 나는, 한 남성 수강생이 피식거리며 웃는 것을 견디고 있었다. 대체 어떤 대목이 우스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표정을 오해한 것이겠지 싶어 그에게 한번 물어보았다. "글을...참 잘 쓰는 분이네요." 난해한 외국어로 된 텍스트를 읽은 표정을 지으며 그는 짧은 감상 후기를 마쳤다. (여전히...어떤 부분이 웃겼는지를 짐작할 수가 없다)


그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잘 쓴 글이라서 가져왔다. 할 수만 있다면 수강생들과 밤을 지새워 <헝거>에 대해 논하고 싶었다. 록산 게이는 이 책에서 어린 시절 겪은 성폭력과, 그 폭력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거대해진 몸, 그 몸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자료로 쓴 글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쓴 글을 읽으면 나는 잘 살고 싶어지곤 했다. 작가는 삶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고통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도, 책장을 덮고 나면 내게 세상은 아름다워 보였다. 아주 다른 방식으로.


글을 잘 쓰고 싶어하는 수강생들에게, 스스로와 사투를 벌이며 그 체험을 사유하고, 사유를 온전히 표현하는 작가로서 록산 게이가 글쓰기 롤모델이 될 만하다 여겼다. 글을 쓸 때의 지긋지긋한 자기검열, 그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마음가짐의 면에서도 그러했다. 무엇보다 내 이야기를 타인에게 공개하는 것, 그 중에서도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는 행위가 결코 '사연팔이'로 치부될 수 없음을 전하고 싶었다.


한 수강생은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 "방금 전까지 읽다가 온 책이에요. 마음이 아려서 읽다가 쉬다가 하느라 한달이 걸리네요."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제 곱슬머리나 얼굴의 잡티를 떠올리게 돼요. 외모에 대한 부끄러움이 제 세계를 좁게 만든다는 생각을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야기를 멈추었다. 형광등은 몹시 밝았고, 교실 안의 사람들은 공동체는 아니었다. 누구는 기자가 되고 싶고 누구는 퇴사 후 직업을 찾고 있고...글을 잘 쓰기 위한 이유가 각기 다른 사람들이었다. 발언의 수위와 디테일은 청중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으면 어떡하지..?' '비난받으면 어쩌지?' '안전하지지 않다’는 감각은 자유로운 발언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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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지도를 들고 항해를 떠나는 타입이 아니다. 완벽한 지도를 그리기 위해 내내 고심하다 ‘나가는 문 어딘지 알면 됐지 뭐’ 하며 불쑥 달려 나가는 타입에 가깝달까.


죄송한데 여성전용 수업이에요. 제가 깜빡하고 안 썼네요. 정말 죄송해요. 수강신청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저... 여잔데요?


아뿔싸.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을 때마다 쾌감이 든다. 그제야 나는 내가 이 워크숍을 만들고 싶었던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안전한 청중을 찾고 싶었다.



나를 오해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인 곳. 워크숍에서 우리는 목소리의 볼륨을 한껏 높인다.


밤길에서 치한을 마주친 후로, 퇴근길마다 왼손에 작은 칼을 늘 지니고 다녔던 기억에 관해.


야근 후 기진맥진해져서 잡아탄 택시에서 "아가씨, 이쁘게 꾸미고 어디 좋은 데 가나봐?"라는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씨발에 대해.


산후조리원에서 나와 신생아와 둘이 남겨진 집에서 모든 것이 너무 두려워 오열해버렸던 순간에 대해.


아이의 이상행동이 장애의 징후일까봐 불안해 자기도 모르게 아이가 그 행동을 할 때마다 등을 때리고 '그 일은 없었던 일'로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이야기를 쓰고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에 관해.


글을 쓰다가 눈물이 흐르면 우리는 뜨거운 홍차를 조금 더 마시고 캐러멜을 녹여먹으며 기운을 낸다.

그뿐이다.


누구도 나의 눈물에 대해 피식피식 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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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심연에 빛을 비추는 일은 두렵다. 그 깊은 우물에 괴물이 있을지 몰라서 언제까지고 주변을 서성대기만 한다. ‘언젠가는 말할 거야, 언젠가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감정의 파고 때문에 일상이 다 망가질지도 몰라. 주말 내내 우울해서 일어서지 못할 지도 몰라’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한 청중을 찾는 일이다. 때때로 나는 이 글을 인쇄해 건네준다면 그게 누구일까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본다. 때로는 어린 시절의 내 사진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엄마와의 카톡 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다. 어린 나와 젊은 시절의 엄마에게 전하고픈 말을 써나간다.


때로는 ‘저는 다른 요일반이지만...빈자리 있으면 오늘 가도 돼요? 스트레스가 심해서요...’ 라며 달려 와 사무실에서의 고단한 하루를 글로 쓴 사람을 생각한다. 야근을 하던 중 글쓰기 워크숍을 듣고 다시 택시로 사무실에 돌아가던 사람의 미소를 떠올린다.

내 글이 웃기든 진지하든 아무것도 아니든,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 칭찬해주는 나의 씀씀작업실 동료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나의 뒷배다. 든든한 뒷배다.


내 글과 말에 공감해주는 사람들. 그들에게 내 글은 용기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누웠다가도 일어난다. 내 말의 맥락을 오해하거나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몰아붙일 청중은 내다 버려. 어차피 독서인구야 한줌이여.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를 드러내도 공포스러운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우리의 상처와 고민에 조명을 비출 때, 좋은 청중은 자신의 것에 조명을 비춰 보여준다. 막연했던 두려움은 떨어져 나간다. ‘말을 하게 되면 무시무시한 일이 생길지 몰라’라는 모호한 기분은 사라져 버린다. 내 상처를 고백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의 자기고백을 돕는 강력한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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