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매일 즐거울 만큼만 쓰세요. 고통스러워야만 창작인 건 아니에요
글 한 편을 제대로 완성하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수강생을 자주 만난다.
그럴 때마다 매우 염려되는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네, 저도 어제도 오늘도 그렇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멈칫하는 사이, 수강생이 앞서 나간다.
"고통스러워야 창작이겠죠....어려운 게 맞겠죠...."
앗, 아니에요! 아니야아아아아아아아.
빨간 신호등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기오리들을 보는 기분이 되어서, 나는 엄청나게 적극성을 띈다.
우선 수강생에게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쓴 짧은 글, 혹은 따로 저장해 둔 글을 보여달라고 요청한다.
1) 수강생에게 조각조각 써 둔 글이 있다면?
-> 한 개의 조각글을 길게 확장해보거나, 몇 개의 조각글을 이어서 한 편을 만들도록 지도한다. 한 두 시간 안에 어떻게든 한 편을 완성해 보도록 이끈다.
그 한 편의 완성글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별로'일 것이다. 그런데 어떡하겠어요? 그게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창작자가 되는 첫번째 스텝이다.
내 창작물의 남루함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태도.
언젠가의 빛나는 완성품을 그리며 오늘의 초라한 조각글을 회피하지 않는 것.
오늘 쓸 수 있었던 '별로인' 글을 외면하지 않는 일.
나의 남루한 완성품을 매일 맨눈으로 바라보는 일,
그것이 창작자의 가장 귀한 태도가 아닐까.
창작자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는, 패기도 살기도 아니다.
창작이란, 영화 속의 록커 스피릿, 그러니까 젊은 날의 불꽃을 화르륵 불태우고 소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니까.
나의 남루함을 매일 직면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 그 지난함과 초라함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런 식의 '생활'이 창작이다. 글쓰기 생활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내 창작물이 내 머릿속에 있는 잡히지 않는 아우라만큼은 멋지지 않다는 것을 매일 매일 수용하는 생활, 그게 창작이다.
별로인 날과 더 별로인 날과 환희에 벅찬 날과 영원히 살고 싶어지는 날이
길게 이어져 인생이 되듯이
우리의 글쓰기도 그렇다.
2) 짧게 쓴 것도 없다고 한다. (또는 강사에게 보여주기 싫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는 '미루기'를 택하도록 한다. 부담감을 쓰레기통에 버리자고 살살 꼬신다.
1)보다 더 풀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좋아한다면 블로그 비밀글이라도, 인스타에 2-3줄 끄적임이라도 있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드로잉을 좋아하는 사람은 종이가 없으면 카페 냅킨에라도 풍경이나 인물을 끄적거리곤 한다. 요리를 좋아하면 라면 하나를 끓여도 고수를 얹어보거나 토마토를 넣어보는 식으로 이런 저런 시도를 한다.
그런데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면서, 단 한 줄도 쓰지 않는 사례를 아주 자주 본다. 간혹 '어디에도 전혀 글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비밀주의자들을 만난다. SNS시대가 된 후로 그런 사례가 더 많아졌다. 글은 생각이므로, 내 생각을 드러내면 평가당하고 비판받을까 봐서 꽁꽁 숨기는 경우다.
마음 속 글을 외부로 드러내는 일에 대한 저항감이 아주 큰 경우, 접근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
사는 것도 어려운데, 우리 어려운 일은 나중에 합시다.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뤄 봅시다.
재미없는 일은 내일의 혹은 한달 후에 내가 하겠지, 뭐.
그럴 때면 요가나 수영, 노래 등의 비유를 든다. 우리가 좋아하는 취미들을 모두 소환해 온다.
나는 주로 설거지를 할 때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뮤지컬 넘버나 에프엑스의 노래들을 흥얼거린다. “핫써머 핫핫 써머. 너무 더워. 너무 더우면 까만 긴 옷 입자. 외국인에게 길을 알려주자.”
3분짜리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창하지 않아도 마음은 충분히 날아오른다.
그런가 하면, 남편은 샤워를 할 때마다 프랑스어로 된 코미디 곡을 부르고, 문을 열고 나오며 시치미를 뗀다. “노래 불렀지?” 물으면 “귀가 이상해요? 안 불렀어요!” 거짓말을 한다. (박자감각이 없다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 한다) 이 노래들은 완벽한 구조로 마무리되지 않았으나 즐겁다. 글쓰기는 왜 그러지 못할까.
요가 학원에는 가느다랗지만 근육이 새겨진 팔에 알 수 없는 산스크리트어로 타투를 한 ‘힙스터 요기’들이 많다. 멋질 뿐 아니라 요가도 수준급이다. 물구나무 서기 시간이 되면 나만 빼고 모두들 물구나무를 선다. 근육도 타투도 실력도 없는 나는 그때마다 아기 자세를 한다. 하지만 즐겁다. 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요가 학원에 가기 때문에. 물론 부럽다. 베테랑들 사이에서 나의 아기 자세가 약간은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슬프거나 조바심이 나지는 않는다. 글쓰기도 요가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수영 처음 배울 때 50미터 왕복할 수 없잖아요. 발차기부터 시작해서 단기목표를 세우죠. 수영장 끝에서 끝까지 딱 한번만 자유형으로 가자, 같은 식으로요.”
죽기 전에 소설 한 편을 쓰고 싶다는 수강생에게 그렇게 말했다.
“대체 한 편의 길이가 얼만큼이어야 되나요? 수영처럼 조금씩 길이를 늘려가면 어때요? 문단이 정해둔 단편소설의 적당한 길이에 맞춰서 나를 몰아세우고, 그만큼 완성하지 못하면 나는 루저라고 속상해 하지 말고, 오늘은 오늘의 소설 한 편을 써 보면 어때요?”
처음부터 수영 50m 왕복하는 사람은 없듯이 우리의 첫 소설이 ‘이상문학상’에 실린 단편 소설과 같은 마땅한 구조와 마땅한 길이를 가질 수는 없다. 운이 좋아 그래도 죽기 전에 단 한 편을 썼다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
처음 글을 쓰고 싶어졌을 때, A4 한 페이지 정도의 소설을 써서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이게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어서 '7분 소설'이라고 겸손을 떨었다. "제 글이 시간을 들여 읽을 만큼의 수준은 안되니, 7분만 투자하세요." 안타깝게도 몇 편 쓰다 말았다. 정식으로 소설쓰기 아카데미에 다녔기 때문이다. 소설의 구조를 잡는 법, 캐릭터 만드는 법을 길게 듣고 여러 편의 한국 소설을 읽고 각자 완성한 200자 원고지 100매 정도의 단편을 제출하는 수업이었다. 50명 중 단 한명이 자기 어머니의 위대함을 찬양한 긴 단편소설을 제출했다. 그 단편에 대해 50명이 한 마디씩 코멘트를 하는 마지막 수업을 마치면서, 소설에 대한 흥미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때, 그 수업을 듣지 말았어야했어. 그랬다면 평행우주의 나는 여전히 7분 소설 쓰기의 즐거움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씩 길이를 늘려갔을지도 모른다. 소설가를 부러워 해 본 적은 없으니까, 등단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면 A4 2장으로 늘려갔을지도 모른다. 쓰다가 “생각보다 쓰는 일에 재미가 없네?”싶으면 그만 두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흥분이 되어 5장을 썼을지도 모른다.
글 한 편을 제대로 완성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성경책이나 불경, 코란의 어디 귀퉁이에도 써 있을 것 같다. 원시인들이 살던 동굴 속 벽화에도 ‘완성하지 못한 것은 글이 아님’이라고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중요해서,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말. 글의 끝을 맺는 일의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글쓰기 책에서 다루고 있다. 소설이라면 단편이든 장편이든 한번 시작한 글은 어떻게든 모양을 갖춰서 완성을 해보라는 것이다. 기사든 에세이든 논평이든 마찬가지다. ‘이제 끝이다’고 느낄 만큼, 완성된 구조를 갖춰 마무리해 보는 것의 중요성은 너무 중요해서, 강박이 되어 버린다.
이 강박은 이제 막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들에게 모래 주머니 같은 것이다. “아아, 이걸 달고 달리면 근력이 붙는다고는 하는데....참 좋은데....일단 지금은 근력이 하나도 없어서 한 발짝도 못 걷겠어요! 난 운동에 재능이 없나 봐....” 글 속에 재능이 반짝이는 수강생이 이렇게 말하면 몹시 안타깝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