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고 물을 때는 반드시 입꼬리를 올리는 습관이 있었다. 이따금 어려운 상대에게 왜를 물을 때는, 한껏 눈썹을 내리며 눈을 크게 뜨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나의 질문을 오해하지 말고 순수한 물음표로써 해석해 달라는 안간힘이었을 것이다.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안전한 태도를 갖추기 위해 긴장하다 보면 질문과 답변의 에센스에 집중하지 못했다. 늦은 밤 노파처럼 중얼거렸다. “지루해.” 친절하고 사려 깊다는 평판을 얻은 반면에 조심스러운 말투와 쿠션 언어를 내버리고 싶다는 갈망이 쌓였다. 나의 언어가 오해될까 절절매던 시절, 대화는 대개 권태로웠다.
유년 시절, 왜 매일 밤 칫솔질을 해야 하냐고 질문하다 현관문 밖으로 쫓겨난 적이 있다. 몇 번의 질문에도 “그럼 안 할래?”란 명령만 돌아오자, 나도 부모에게 큰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상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발을 굴렀다. 끼익끼익 거렸다. 언어는 길을 잃었고 자동차에 치인 연약한 동물 같은 소리만 비어져 나올 뿐이었다. 그건 온몸의 감각을 활용한 마지막 질문이었을까.
정확한 언어로 소통할 수 없겠다는 절망감이 피어난 건 아마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당신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나도 기꺼이 그러하겠다고. 모두가 ‘그냥’이라고 말하는 곳에서 나도 ‘그냥’을 학습했다. 당신이 내게 ‘이유는 없고 그냥 실행하라’고 명령한다면, 나도 칫솔질을 안 할 이유를 대지 않고 그냥 하지 않겠다는 답을 줄 수 밖에 없다고.
눈앞의 부모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 버린 이상한 세계를 향해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아대는 기분으로 생각했다. ‘이상한 나를 세계 밖으로 쫓아내라. 하지만 절대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점이 사춘기의 전조였을 텐데, 이후로 사춘기를 겪지는 않았다. 포기와 권태를 익힌 어린이는 그냥 애어른이 돼 버린다.
내가 성장한 한국 사회에서 “왜?”라는 질문은 발화자의 의도와 다르게 쉽사리 반박 또는 공격, 나아가 시비 걸기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질문할 수 있는 권력은 서열에 의해 배분됐다. 신입사원은 (업무에 대한 질문은 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물으면 안 됐다. “이 프로젝트를 왜 해야 하지요?”란 질문은 ‘업무 의욕 없음’으로 인사고과에 반영될 터였다. 면접위원은 답변마다 ‘왜’를 물어 답변자를 탈진상태로 만들지만, 그들에게 질문을 던질 수는 없다. 그런식의 ‘압박면접’은 상대가 얼마나 질문을 잘 참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모멸을 참고 그들이 원하는 답만 내놓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인내력 테스트다.
11살 때의 ‘칫솔질 사건’의 ‘왜’를 30대가 되어서야 탐구해 보았다. 아무리 온 힘으로 질문한다 해도 그 누구도 나의 질문에 공명해 주지 않는 과정에서 쌓인 분노였다. 단순한 호기심부터 부조리에 대한 저항에 이르는 모든 ‘왜’에 80-90년대의 양육자와 교육자들은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왜는 일본 요가 왜지.” “궁금한 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
질문의 구멍을 시멘트로 발라버리는, 엉뚱한 민간 속담(?)을 듣고 또 묻고는 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왜 그렇게 다른 소릴 해요? 왜 대답을 안 하세요?”
이쯤 되면 그들은 ‘어린 게 당돌해서 봐 줬더니 기어오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따박따박 말대답하지 마라.”
매일의 감정과 상황에 대해 스스로 이유를 묻지 않은 글은 정황묘사에만 머무른다. 물론 그 글도 흥미롭다. 자신과 타인, 사회에 대해 쓸 때 구체적인 정황 묘사를 하는 능력은 그닥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수월하게 발전하는 것을 본다. 대화 쓰기 캐릭터 만들기, 상황 서술하기 등의 스킬을 배우고 활용한 뒤 제출한 과제는 무척 흥미롭다. 그 구체성과 다양성에 삶은 경이롭다는 감탄도 자주 느낀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나의 관점에서 써 내려갈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유다. 어떠한 것에 반대한다면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어떠한 것을 사랑한다면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좋은데(싫은데) 이유가 어딨어’라는 문구로만 지면을 채울 순 없다. 글쓰기와 말하기가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글은 대충, 그냥, 다들 그러기에, 나만 다르기 싫어서, 라는 이유로 채울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글은 누구의 마음도 사로잡을 수 없다. 스스로의 마음도.
그렇다면 왜 더 탐구하지 않고 그 쯤에서 멈추는 글이 많은 걸까? 아마도,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수강생들의 글쓰기 과제를 읽으며 단락의 맺음 부분에 질문을 달아 돌려주는 일이 많다. 질문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에서 성장한 동년배의 여성 수강생들에게, 글쓰기는 물론 삶의 전반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답알기가 아니라 정당한 질문을 던지는 연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두렵고 불편해도 물어야 한다. 왜 그렇게 느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택시기사가 내 요청이나 질문에 대꾸하지 않을 때
유럽여행에서 느닷없이 니하오를 당했을 때
왜 기분이 상하나요?
불안인가요, 모멸인가요, 불편인가요, 지긋지긋함인가요? 그 모두인가요?
스스로 왜를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내가 바라는 삶의 형태를 깨닫게 된다. 어떠한 삶의 양식을 당신이 택했다면, 선택의 이유를 꼭 알아야 한다. 답이 아니라 답에 이르는 과정. 그 사고의 과정을 명확하게 알기 위해 이유를 물어야 한다. 그러면 행여 그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유턴하게 될지라도, 후회할 일은 없다. 이렇게 되면 2-3줄의 ‘이유’를 찾기 위해 시간이 제법 걸린다.
아마도 스스로를 재양육하는 마음으로 수강생들은 나의 질문을 확장해 만들어낸 스스로의 질문과 그에 대응하는 지금의, 최선의, 올바르지 않아도 되는, 정답이 아니라 고민의 결과인, 답들을 달아 돌려준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온갖 찬사를 달아 되돌려준다. 글의 완성도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겠으나, 물러서지 않은 용기에 대한 응원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존엄을 지켜내겠다는 의지에 대한 존경이기도 하다.
오늘의 한 줄 말씀이나 유튜브 스님 말씀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하루는 살 수 있어도 평생을 지탱할 수는 없다. 인생은 단답형이 아니기에. 답은 정답으로 가는 길의 최종 도착지가 아니라, 길의 곳곳에 뿌려져 있다. 그렇게 얻은 답은 어떤 실수나 실패에도 인생이 미끄러지지 않게 돕는다.
질문을 하며 걸으면 가는 속도는 더딜지 몰라도,
우리의 인생이 매순간 존엄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