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잘 지내지?
한국의 오늘 날씨는 어때? 내가 사는 곳에는 여전히 햇살이 쏟아붓고 있어. 우리, 찜통 속 만두가 된 것 같다고 농담했었지. 남프랑스에서는 오븐 속 빵이 된 것 같아. 살갗이 바삭바삭 구워지지. 어제는 벤치에서 한잠 자고 일어났는데 청바지 단추가 숯처럼 달궈져서 배를 뎄다니까.
이건 전혀 불평이 아냐, 나는 그 느낌을 아주 좋아해! 프랑스에서 나는 이곳 사람들처럼 무언가를 아주 길게, 할 일이 별로 없는 사람처럼 기다랗게 설명하게 돼. 매일의 날씨마저. 그러다보면 어쩐지 투덜대는 느낌이 들어. 길게 설명할수록 단점이 잘 보이는 건 당연하잖아. 한국에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재빠르게 딱딱딱, 자 오늘도 화이팅합시다! 이런 무드가 환영받으니까. 뭔가 길게 늘어놓는 사람은 흔하지 않지.
한 가지를 아주 길게 생각하는 것.
이건 긍정적인 변화일까, 아닐까.
스스로의 변화를 점검하는 데에는 장소 이동이 최고니까, 이번 가을에 한국으로 내 몸을 옮겨 놓으면 그제서야 알게 되겠지.
날씨 이야기로 돌아와볼게. 한국에선 사람들이 날씨 이야기를 할 때 언제나 딴청을 피웠거든?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이야기로 건너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지루한 스몰토크였지. 빅토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랬나 봐. 한국을 떠나 아기같은 언어로 살게 되면서, 나는 날씨 이야기를 사랑하게 됐어. 좋은 날씨다, 덥다, 춥다, 안 덥다, 안 춥다, 햇살이 뜨겁다, 비가 온다, 눈이 온다, 안개가 꼈다 같은 문장의 단어들은 간단하거든. 그래서 뇌의 외국어 기능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야.
한국어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이 한국 밖에 산다는 건 어쩌면 모순이지 않아? 내가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일할 땐 한국어를 집안에선 영어를 집 밖에선 불어를 쓰면서 나는 여러 가지의 기준치를 매일 낮춰. 내 언어에 대해서, 사람 사이의 소통에 대해서 매일 조금씩 포기하지. 말하기는 글쓰기에도 영향을 줘. 내가 한국어로 에세이 쓰기를 시도했을 때의 동기, 즉 신중하게 고른 단어로 정교하게 소통하겠다는 욕망을 버리는 나날이야.
왜냐면 나는 내가 실수덩어리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하거든! '불어를 말한다'는 사실 자체에 긴장해서 내가 가끔 엄청난 말실수를 하거든! 내 실수를 용서받으려면 친구의 소통불가도 용서해야 하잖아? 그게 공평하지. 한번은 친구1이 그룹챗에서 스시를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잠에서 덜 깬 내가 '나는 프랑스에선 스시를 안 먹어'라고 단호박처럼 말해버린 거야. 프랑스에서 파는 스시는 가격은 비싸고 질은 낮거든. 문제는 그룹챗 안에 스시집을 하는 중국인 친구가 있었다는 거야. 다른 친구가 놀라서 나에게 개인 톡으로 언질을 주었고 나는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스시집을 하는 친구에게 따로 사과를 했지. '내가 특히 좋아하는 생선이 있는데 그 생선을 프랑스 스시집에선 안 판다' 구구절절, 구구절절.
이 뿐만이 아냐! 프랑스어로 사캐스틱하게 실컷 농담을 하고 난 다음에 한국 친구에게 같은 톤으로 농담을 했다가 사과한 적도 있어.
비꼬고, 비아냉대고, 냉소적이고, 빈정대는 농담들.
여기에는 타인과 친해지겠다고 그런 농담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도 조금은 물이 드나 봐. 예컨대 이런 식. "너 지금 키보드를 네 손가락으로 죽이고 있어? 그렇게 해서 죽겠어?" 이건 공유작업실에서 처음 만난 마튜가 내 타자소리를 듣고 한 얘기야. 울고 싶은 마음으로 '저소음 키보드'를 검색해 샀고 그걸 배송받기 전까지 작업실에 나가지 않았어. 그런데 여기서 마튜는 프랑스에서 사교적이고 환영받는 사람이라니까! 게다가 키보드에 빵꾸가 날 정도로 타자를 쳐대. 그러니까 그는 조용한 걸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조용히 하란 말을 나에게 간접화법으로 한 게 아니었고, 이 사무실은 다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거나 수다를 떨며 일하는 분위기였고, 나만 쭈글탱이가 되었던 거고. 마튜는 나랑 허물없어지려고 농담한 거래!
우리는 모두 너무나 달라. 그래서 외국인으로 사는 건 '내가 절대로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무엇'을 계속 버리는 과정이야.
전에는 대화에서 발언권을 독점하는 하는 사람을 이기적이라며 진저리쳤지. 대화의 시소가 평평하지 않잖아! 너 한번 나 한번 해야지, 하면서 서서히 멀어진 적도 있었어. 지금은 사람을 좋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써. 아마 외로워서 그럴 거야. 나와 다른 모두가 싫어서 혼자가 될 순 없잖아.
이민자 친구들 중에는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 자신을 증명한다고 믿어왔던 지성과 유머를 타인의 언어를 빌려 증명하긴 어려워 고독해지기도 하고, 자기 나라에선 겪지 않아도 되었을 차별을 겪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추락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매일 이별하지.
그런 고통 속에 있다가 내 말에 귀기울여 주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헐거워진 수도꼭지처럼 말을 쏟아내는 건 당연해. 숨은 제대로 쉬는 건지 싶게 자기 삶의 모든 서사를 쏟아내는 사람도 많이 보았어. 처음에 나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속 투렛증후군 환자를 본 것처럼 많이 놀랐지. 지금은 놀라지 않아. 나는 갑자기 '오예! 셀카를 찍자'고 하거나 프랑스어 단어를 잘 못 알아듣는 척 하기도 해. 산만한 사람이 되면 환대를 더 잘 할 수 있어.
비겁한가?
이건 비겁한 일인가?
잘 모르겠어.
이민자로 산다는 건, 다 알던 것을 새로 재편하는 과정이기도 해서.
나는 비겁함이 무엇인지 새로 정의해야만 하지.
나는 매일 언어를 소멸시켜. 한국어를 점점 구글번역체로 말하게 된다. 나를 포함한 이민자 친구들은 매일 번역기를 돌려서 채팅을 해. 각자의 언어가 프랑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많은 맥락과 관용어구가 굴절되지. 아주 중요한 것이 탈락되어 텅 빈 메세지가 되기도 해. 그리고 번역기 사용자로서의 화자는 그 탈락을 눈치채지조차 못한다는 것이, 슬프게 웃긴 일이야.
그 모든 오류가 소통에서의 오해로 귀결되는데, 그래도 아무도 신경 안 써. 오해를 두려워하면 말문이 막혀버리는 것이 외국어로 생활하는 일이니까. 중국인 친구는 5년 동안 불어를 한 마디도 못했대. 아르헨티나 친구도 2년을 그랬고. 한명은 비자 때문에 외부 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한명은 스페인어 발음이 묻어나는 자신의 불어를 조롱당한 기억 때문에.
부디 나를 위해, 깊게 한번 상상해 줄 수 있겠어? 인간이 언어 없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굴같은 차갑고 어두운 고독을. 말을 할 때마다 내 앞에 선 누군가가 이맛살을 찌푸리는 광경을. 발음을 할 때마다 지적을 받아 결국 혀가 안으로 말려드는 압력을.
나는 이제 상상할 수 있어.
그래서, 그 고독을 통과하고 나니까
나는 소통의 비겁자가 되었어.
친구가 보낸 메세지가, 아마도 자기 나라식 표현을 불어로 바꾼 것인 듯 한데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을 때 아, 좋은 말이겠지 하고 빨갛고 커-다란 하트를 붙여.
너는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말을 했겠지, 하면서.
잘 지내.
또 편지할게.
프랑스에서 은성.
소은성 <친구들에게>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에 사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메일로 보내드리는 에세이 메일링입니다. 새로운 시즌 구독은 작가소개에서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