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 언니에게

by 소은성

순이 언니, 잘 지내지요? 오늘 아침에 언니에게 한국의 가을 단풍 사진을 보냈더니 언니는 '아침 달리기에서 본 것'이라며 프랑스 우리 마을 사진을 일곱 장이나 보내주었죠. 하양이란 단어와 파랑이란 단어가 형상이 된 것 같은 선명한 하늘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 하늘 아래에서 우리 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국어 음률에만 온전히 집중했던 그 순간들처럼요. 언니나 저 같은 극동아시아 사람들 앞에서, 마스크 위로 눈동자가 둥그렇게 커지는 사람들이 있는 그 마을에 우리 둘의 수다가, 한국어의 스타카토와 포르테가 울려 퍼졌었죠.


언니가 운영하는 문구점에 어떤 미치괭이가 와서 그랬다면서요. “어떤 빽을 쓴 거야? 너는 불어도 못하는데 어떻게 직원이 되었어? 나는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데, 이거 불공평하지 않아?” 언니는 못되고 몰상식하고 무례한 손님들의 이름과 그들의 행동과 자신의 마음을 적은 데쓰노트가 있다고 했어요. 글쓰기는 좋은 것이지만 저는 때로 글쓰기에서 무력감을 느껴요. 그것으로 족한가, 종이뭉치에 불을 붙여 세상에 던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에 잠기려는 순간 언니가 말했어요.

“시발, 한번 하고 나면 시원해져. 에이, 시이이바아알.”


언니, 우리는 같아요. 우리가 동류라는 것이 기뻤어요. 저도 시발을 좋아해요, 언니. 언니의 걸쭉한 시발이 너무 웃겨서, 여러 번 내뱉어본 것 같은 능숙한 리듬감이 웃겨서 저는 배를 잡고, 주저앉고, 박수치고, 허물없이 언니의 팔을 두드렸어요. 여기서는 흥에 겨울 때조차 타인의 팔을 치며 웃는 사람을 볼 수 없으니까, 문득 제가 저의 한국인 친구들과 하던대로 그렇게 할 때면 ‘얼음!’ 이 되는 사람들을 본 이후로 금지가 된 두드림을 언니에게 조금 해 보았지요. 좋았어요. 술래가 와서 ‘땡!’을 쳐 준 것처럼 자유가 되었죠.


사랑이 뭘까요, 언니.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매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누어요. 사랑의 속성을 알고 싶어서 한국에서 머나먼 프랑스까지 간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노력을 할수록, 더 알 수 없어지는 걸요. 베개, 베개, 베개 하고 열번 부르면 베개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다급히 결론을 내렸어요. 사람과 사람이 상대에게 몰입할 때, 그 찰나가 바로 사랑이라고요. 그러자면 덜 허무해져요. 그러한 몰입의 순간이 사랑이 아니면 뭐예요, 언니? 상대의 단어 하나 하나를 몸에 새기듯 경청하는 그 순간들이, 그 단어들이 몸에 속하고 피로 흐르고 살이 되고 내장이 되는 그런 순간들이, 사랑이 아니어요, 언니?


처음으로 ‘두 개의 집’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때, 한국에서는 이국을 이국에서는 한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나에게 적응하려고 할 때에 이런 마음을 먹었어요. 머물고 깊어지고 뿌리내리는 사랑 말고도, 짧고 강렬하고 때로 흩날리고 기어코 떠나야만 하는 사랑도 공평하게 즐기자는 다짐을.


제가 지휘자처럼 두 손을 마구 저으며 이렇게 말하면 언니는 말하겠죠. “자기는 정말 솔직하고 창의적이다.” 솔직함을 무분별함으로, 창의성을 기이함으로 오해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제 미간에 주름이 하나 생기는 것을 언니는 놓치지 않고, 저를 안심시키듯 또 말하겠죠.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해.”


언니와 저는 어떤 공통점 때문인지 둘이 함께 있을 적마다 반드시 부적절한 시선의 대상이 되죠. ‘몸이 작고 머리카락이 길다는 이유일까요’라는 제 중얼거림에 언니는 의외로 맞장구를 쳐 주지 않았어요. “아냐. 그냥 무식한 것들이라서 그래.” 세상을 좁고 재미없게 보는 어떤 사람들이 떠올리는 전형적인 아시안 피메일의 이미지를 책으로 만든다면 언니와 저도 포함이 되겠지만, 피해에서 자책을 찾는 제 말에 언니는 절대로 호응하지 않았고 그게 저는 너무 너무 좋았어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언니는 유머 1위예요. 제 유머감각이 좀 별나다는 소리를 자주 듣긴 하지만, 아무튼요. 지난번에, 그 넓디넓은 공원에서 기어코 우리에게 아슬아슬 닿을 듯한 거리로 지나가던 크고 허연 무처럼 생긴 남자 기억나요? 언니는 그 자가 지나가자마자 이렇게 말해서 제 배꼽이 날아가게 했죠. "아쉽다. 발을 탁 걸어버릴 걸. 그럼 확 넘어지고. 너무 웃길텐데." 웃다가 눈물이 조금 고일 정도로요.


그 뒤로 저에게 그 말이 주문이 되었어요. 산책 중에 더위를 식히려고 크고 아름다운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아 행복해졌던 순간에 침입해 제 입술을 가리키며 엄지손가락을 연신 치켜들며 '졸리 봉봉' 이라고, 너는 예쁜 캔디라고 부른 남자에게 저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아 마치 말을 하지 못하는 여자처럼 손을, 그저 손을 저어서 날파리떼를 쫒듯 하던 그 순간에 저는 순이 언니의 말을 주문으로 외웠어요. ‘아쉽다, 발을 탁 걸어버릴 걸, 그럼 확 넘어지고, 너무 웃길텐데. 너무 너무 웃길 텐데.’ 눈물이나 찡그림보다는 웃음이 좋으니까요.


도둑이 제 모든 일의 도구들을, 노트북과 모니터와 안경과 일곱 권의 한국어 책을 훔쳐가서 경찰서에 다녀온 날 언니가 저를 데리고 맥주를 사주러 갔죠. 아마 많은 이민자들이 그럴 텐데요. 불길한 일이 벌어졌거나 벌어질 조짐이 있을 때에 그들은 집안에 자신을 숨겨요. 나를 보이지 않는 게 최선이야. 말을 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 받지 않을 거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나쁜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 비논리적인 생각이란 것을 알아도 마음은 그렇게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아요. 열쇠를 챙겨 구두에 발을 꿰었다가 현관 앞에 한참을 주저앉아 있던 경험들이 저에게, 제 이민자 친구들에게 있었을 거예요.


중국 친구가 이렇게 말했을 때 저는 그녀의 현관을 상상했었어요. "5년 동안 나는 불어를 하나도 못했어. 비자가 불안정해서 사회활동을 할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너는 어디에 있었어?" 제 반응이 좀 이상하죠? 하지만 저는 그래서, 너, 어디에, 머물다, 정도의 단어밖에 말할 줄 모를 때였으니 이해해 주세요. 친구가 어딘가를 향해, 딱히 저에게는 아닌 방향으로 소리쳤었죠. "집. 그 안에. 집 안에 매일, 매일, 매일."


제 물건들을 자루에 담아메고 담배를 피우며 작업실 문을 나서는 도둑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서 씨씨티비를 오래 바라봐야만 했던 그 날, 심장이 조이는 듯 했어요. 그 공포는 뭐였을까요. 도둑이 여자였더라도 제가 그렇게 두려웠을까요. 저는 저를 위축되게 만들었던, 그곳의 남자들의 얼굴이 그 도둑의 얼굴에 모자이크된 것을 느꼈어요. ‘내가 드디어 미친 것일까, 왜 나는 이것과 저것을 혼동하는가, 왜 모든 것을 섞어서 흐릿하게 판단하는가’ 짚어보려던 순간에 언니가 보낸 메세지 알람소리가 저를 구했죠. "내가 집 앞으로 갈게. 자전거 타면 금방이야. 말을 해야 괜찮아져."


슬픈 여자, 분노하는 여자, 그러다 미친 여자의 말은 극단으로 흘러요. 침묵, 혹은 말을 멈추지 못하기. 저는 전자예요. 말이 터져나올까봐 목구멍에 힘을 줘요. 언니와의 약속을 취소하려고,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려고 쓰던 메세지를 지우고 저는 머리를 신발을 신었어요. 언니 몸만큼이나 조그만 자전거를 쌩쌩 달려 와 손을 나비처럼 흔드는 언니를 보자 제 머릿속의 검은 얼룩은 잠깐 사라졌어요. 일단 술을 마시자, 나의 혼란은 뭐, 그러거나 말거나.


얼룩에 대해 이야기해 볼게요. 재미교포 시인 캐시 박 홍의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에는 이런 문장들이 있어요. 네일샵에서 자신을 함부로 대한 직원 소년에 대해서예요. 캐시는 소년이 일부러 자신의 손톱 밑 살을 아프게 파헤쳤다고 느끼고 그렇게 서술해요. 유색인종인 소년이 백인이 아닌 같은 유색인종인 자신을 더 차별했다고 짐작하죠.

“나는 피해망상이라 할 정도로 과도하게 예민해져 나 자신의 불안을 몽땅 소년에게 투사해버린,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다. 정말 아팠는지 아니면 아프다고 상상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 기억을 너무나 여러 번 곱씹은 나머지 형체가 없어지도록 짓이겨 놓았고, 그리하며 소년은 분개의 얼룩이 되고 나는 특권의 얼룩이 되고 결국 우리가 하나의 얼룩으로 번져 그냥 나 하나로 합쳐져 …”


제 물건을 훔친 도둑은 백인의 얼굴이 아니었어요. 제게 얼룩을 남긴 사람들의 얼굴도 희지 않아요. 그래서 그 얼굴들이 다가오면 저는 도무지 몸의 경직을 풀 수 없는데, 스스로의 그 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저에게 난감하고, 그래요,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저에게 얼룩을 남긴 사람을 멸칭으로 부르고 욕을 하고 때리고 침을 뱉고 싶은 마음을 정제해야 한다는 마음이 저를 혼란하게 만들어요. 그들이 약자거나 피해자이기 때문에? 혹은 제가 어느 틈에 그들을 어떤 ‘그룹’으로 묶어 바라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제가 그들에 비해 돈이 많고 교육을 더 받은 계층이라서?


생각은 위험해요. 얼룩이 번지게 하죠. 그날 저는 여러 개의 얼룩과 저의 투사와 도둑의 형체를 그냥 하나로 합치는 작업 중이었죠. 그렇게 커다란 얼룩이 되어 집안 어느 곳에 대충 묻어있으려던 참이었는데, 언니가 와 버린 거예요! 저는 <마이너 필링스>와 같은 책의 칼날같은 통찰을 버팀목 삼아 사는 사람이 맞아요. 하지만 저에게는 순이라거나 민정이, 경은이, 지민이, 민경이, 혜원이 같은 한국 여자들의 순하고 평범한 이름들과 말이 반드시 필요해요. ‘아이고, 작가라 역시 깊은 생각을 한다. 근데 빨리 밖으로 나와. 오늘 뭐 먹을까?’ 같은 말들이 저를 구해요. 집안의 얼룩이 되지 않도록요.


그날 우리가 맥주를 마시러 간 술집 주인이 베트남 여자들이 왔다며 다른 할아버지 손님들에게 말했고 손님들도 수군거렸죠. 베트나미즈, 베트나미즈. 귓가에 쟁쟁 울리는 베트나미즈. 나는 한국인이에요, 같은 전형적인 대답은 불필요해요. 베트남여자란 말은 아시안 여자를 뜻하는 용어니까, 그들에겐 옳은 용어인 거죠. 혼자였다면 마음이 조금 구겨졌을테지 언니랑 있으니 천하무적이었어요. 사실 그 술집은 술집이라기보다는 담배가게이고 이민자 할아버지들이 단골인,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절대로 가지 않는 곳이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오래 걷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곳에 그냥 들어가버렸죠. 금지를 만들지 않는 것, 경계를 짓지 않는 것은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둘이라면 괜찮아요. 우리의 웃음 소리로 묻어버려요, 우리를 희롱하듯 부르는 저 소리들을.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정말이지 기역부터 히읗까지 모든 자음을 아우를 듯한 삶의 모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제 맘은 그러거나 말거나.





소은성 <친구들에게>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에 사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메일로 보내드리는 에세이 메일링입니다. 새로운 시즌 구독은 작가소개에서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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