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고 말하지 말기

by 소은성

1 안다고 말하지 말기

마스크는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인사했어?” 연인의 질문에 나는 당장에 목이 뜨거워진다. 그는 내가 펍에서 동전을 건네고 나올 때 주인에게 인사를 했냐고 물었다. 인사, 했어, 했지, 당연히 했겠지. 하지 않았으면? 내가 인사도 모르는 무례한 사람으로 보여? 한국어의 어미 덩어리를 빠르게 내뱉는 광기를 떠올릴 때마다 목소리가 잠긴다. P.a.r.d.o.n? 발화의 의미를 되묻는 가장 간단한 단어를 떠올려 뱉는다. 나는 요청한다. 네가 아는 예의를 내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그는 당황한다. 단순한 질문이었는데 그 반응은 너무 과해.


나의 화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솟아오를 때 그는 그 현상을 매번 처음 보는 표정을 짓는다. 그는 주인이 네 등 뒤로 인사를 했지만 내가 그것을 듣지 못하고 곧장 걸어나왔다고 묘사한다. “그래서 네가 인사를 안 했다고 생각했어.”


나는 말을 마스크 밖으로 내보내려고 노력한다. 말에 자꾸 점막이 생긴다. 끈끈한 겹들에 둘러싸인 나의 언어. 몸을 좌우로 비틀어 점막을 터뜨리고 뜯어내듯이 나는 말을 이어가려 노력한다. 멈추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노력한다. 노력을, 한다. 한다.


“인사했어, 주인이 못 들었어, 마스크 때문에 목소리가 자주 안으로 잠겨,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기면 타인의 목소리가 귀 안으로 넘어오지 않을 때가 많아.”


이 말을 했던가. 아닌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외국어로 한 말이 쉽게 망각되는 건 발화에 지나치게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일까. 언어와 예의에 대해 그와 나 사이에 높고 낮음이 생기고야 만다는 사실을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쾌해. 네가 여기서 내 신분의 주인이란 것은 건방져.’


나는 기어코 속으로 못된 말을 뱉고야 나다워진다. ‘파트너 비자’라는 이름을 떠올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타래는 불필요하다.


생활에 불필요한 사실이 기어코 떠올려질 때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웃는다. 묵직한 오버코트를 입고 달리듯 힘이 들지만, 울게 되는 건 더 불쾌하니까. 내가 울기 시작하면 다툼은 멈춰진다. 그는 나를 불현듯 사랑스러워하기 시작한다. 그 사실은 은은하게 불쾌해서 자각하기조차 어렵다. 이성애의 모든 순간에는 유쾌와 불쾌가 공존한다. 불쾌를 마주하지 않으려고 보통 나는 더 아기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다.


“프랑스에선 네가 나에게 매일 무언가를 가르쳐. 무거운 문을 열쇠로 여는 법을, 좋은 빵집을 알아보는 법을, 시청에 문의를 하는 법을. 그리고 나는 너에게 고마움을 표해. 고마움은 거짓이 아니야. 하지만....”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거지?”

“통제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너를 통제하지 않아. 너는 자유로워. 너는 자유로울 권리가 있어.”

“나는 더 원해. 나는 자유를 더 원해.”


침묵.


“통제는 사랑의 뒷면이야. 모든 통제가 나쁜 게 아니란 것을 누가 모르겠어? 우리는 우리의 통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해. 너는 어때? 나는 타인의 통제를 두려워해. 어쩌면 지나치게. 그런데 그게 나야. 간단히 말하자면, 혼자가 될 때조차 내가 너의 렌즈로 세계를 볼까 봐 두려워져. 네가 너의 땅에 살기 때문에.”

“이곳은 나의 땅이 아니야.”


침묵.


“그런 말이 아니잖아.”



2 배움

나는 ‘실무적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새로 살게 된 나라의 채소와 과일을 고르는 법에 대해서 배우는 것은 조금 흥미롭고 많이 불편하다. 농부의 시장에서 내가 고른 고구마는 한국에서 먹던 것과 유사한 외양을 가져놓고는 나를 배신했다. 아주 살짝만 구워야 하는 종류였다. 오븐을 열었더니 고구마 죽이 마련돼 있었다. 말랑하고 파슬하게 구워진 고구마를 원했는데. 나는 아파도 절대로 죽을 먹지 않는데.


언어와 예의에 대해 배우는 것은 많이 흥미롭고 조금 불편하다. 그것들이 내 정체성을 이룬다고 여겨서?

이곳에서 나는 자주, 연인에게 나를 채점받는 기분이 들고야 만다.


서울의 대형마트에서 내가 뱉었던 말을 떠올린다. “(웃으며 장난치듯) 그거 맛없어. 누가 그걸 사.” 그때 연인은 침울해졌었다. 나는 사랑하는 이의 침울한 표정에 안달복달하며, 하지만 능숙한 척하는 데에는 도사이다.

“알았어. 사고 망해 봐. 내가 아무 말도 안 할게. 입에 지퍼 채우고. (엄지와 검지를 맞물려 왼쪽 입술 끝에서 오른쪽으로 빠르게 그으며) 자, 이렇게.”

상대의 선택에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애정이다. 아주 한국인다운 애정이다. 우리는

“왜?”를 적게 사용하는 민족의 후예다. 물음표 대신 느낌표를, 아주 잘고 많은 느낌표를 보내는 것이 나의(한국인다운, 이라고 우기자) 애정이다. 맞아, 그치, 진짜~, 그러게, 내 말이, 완전!



3 나는 자유롭게 틀리고 싶어

이곳에서는 외국인의 문법과 단어를 바로 고쳐주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나는 천진한 어린이처럼 고마워한다. 고마워요. 다시 발음해 줄래요? 평생 못 잊겠다. 당신 발음이 예뻐서요.


2주에 한번씩 나는 그 모든 감사와 찬사를 도루묵으로 만드는데, 공부를 못했던 어린 날의 내 남동생처럼 고함을 쳐 버리기 때문이다. “그냥 틀릴 거야. 함부로 고치지 마.” 동생은 자기가 공부를 안하고 못할 자유가 있으니 누나는 신경쓰지 말라는 패기가 있던, 동네 오락실 어딕트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연인 앞에서 나는 길게 부연한다. 일인극 같다.


“틀렸다, 하지 마라, 프랑스는 무슨 규칙이 그렇게 많아? 내가 단어를 내뱉자마자 다들 관사를 고쳐줘. 하나를 말하면 두 개의 설명이 따라붙어. 얘야, 바게트는 une이란다. un이 아니야. 블라블라 블라블라. 내가 뭘 말하기 시작하면 네가 말한 건 틀렸다고 반응해. 말을 하자마자 그러는데 누가 자유롭겠어? 발화하기 전에 이미 틀려있는데? 다들 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편하게 길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교정’에 모종의 거부감이 있고 그 점을 교정하기 위해 매순간 노력한다. (세상에는 그런 타입도 있다는 걸 나를 관찰하며 처음 알았다) 이십대에 두번이나 등록했던 글쓰기 학원도 절반만 출석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숨기고 싶다. 기자가 되고 싶었을 때에는 독학했다. 글쓰기 책을 열 권 사서 포스트잇을 붙이고 자를 대고 밑줄을 긋고 질문 답변을 쓰며 공부하곤 했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알아서 사랑하나? 아니면 몰라서 사랑하나?

이걸 내가 알 수 있을까?

사랑이 끝나기 전에?

알아야 할까?


나는 질문하고 싶은 욕망을 누른다.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사랑을 시작한 거야?”

혹은

“내가 네가 알던 것과 다른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된다면(또는 ‘내가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변화한다면) 사랑을 유지할 수 있겠어?”

혹은 이러한 고백.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믿었는데....(이하 생략).”

혹은 독백.

“나는 원래 사람을 단숨에 믿어버려. 아니면 영원히 상대를 믿지 못할 것을 알거든.”


<안다고 말하지 말라>는 어릴 적 좋아했던 단편 영화의 제목이다. 어쩐지 내 친구들은 그를 만날 때마다 여러 번 못 박듯 말하고는 했다. (조금 부끄럽지만 팩트 전달을 위해 공개하겠다) “언니가 얼마나 웃긴지 알아요? 언니가 얼마나 똑똑한지 알아요? 알아야 하는데, 모르면 안되는데.” 내 연인이 한국어의 속살을 이해할 수가 없는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얘네가 그립네)


“무슨 소통을 해. 소통은 친구하고 해.” 한국의 기혼 여성 친구들은 종종 이렇게 말할 때가 있었다. “애는 낳아. 애는 예뻐.” 나는 고개를 예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술이 좀 취하자 친구가 말했었나. “의무가 뭐 어려워. 의무만 달랑 남은 관계가 뭐 어렵니. 단순하지. 역할이 단순하지. 사랑은 다르지. 사랑이 있어야 관계가 어렵지. 그건 졸라 복잡하지.”


친구 M을 그리워하며 나는 혼잣말을 한다.

아이구, 지겨워. 아이구, 지겨워라. 아이구, 지긋지긋해라.

나를 온전히 이해받고 싶은 집요함이 나에겐 사랑이고, 그건 자주 지겨워진다. 아둔하고 불가능한 욕망으로 느껴진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상대가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기를 원한다. 말하자면 이런 극히 사소한 것들.


대체 이런 걸 써서 뭐하지 싶을 때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 한 대를 피우면 책상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제발 니코틴 중독 따위 걱정하지 말라거나, 투두리스트를 노려보며 업무 종료 후 마실 와인 한 잔을 떠올리곤 하니 내가 자주 마시기 위해 싸구려 와인을 사더라도 내 취향을 판단하지 말라거나, 사랑하는 너와 함께 사는 일을 지속하고 싶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고 무엇에도 빚지지 않고 떠돌다 죽고 싶다거나 하는 시시콜콜함. 중얼거림들. 내가 확신할 수 없는, 유동적인 나에 대한 모든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싶다. 말하지 않으면 더 안전한 것을 모두 말하고 싶다. 나에 대해 모두 말할 수 있는 상대만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결벽일까.


“네가 권한 옳은 선택이 아닌 내가 고른 잘못된 선택을 할 거야. 이곳에선 거의 모든 경우에 너의 지식과 경험이 나의 것보다 옳지. 나는 자주 틀려. 하지만 네가 인내심을 가지고 침묵하길 원해.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 있겠어? 내가 원하는 건 그것 뿐이야. 내가 틀리는 모습을 지켜봐 주는 상대의 인내심. 원하는 곳으로 질주한 뒤에 고꾸라질 거야. 그게 나의 자유야.”


오늘 나의 영어는 방언처럼 빠르고 무질서하게 흘러나온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수정하고자 할 때, 정밀한 대답 대신 침묵하는 습관이 있다. 침묵하는 그 앞에서, 각서를 받고 손가락 도장을 찍고 싶은 초조한 마음을 애써 나는 누른다.


오전에 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문과 창문에 달았다. 우리를 둘러싼 풍경이 그럴싸하게 예뻐서 기분이 나아졌다. 오후에 나는 일을 빨리 많이 할 수 있었다. 신속한 거짓말이 얼마나 편리한지. 본질을 보지 않고 사는 건 얼마나 즐거운지. 남들은 어떻게 결혼계약을 유지하는 걸까, 모두 초능력을 품고 있군, 감탄하며 유리창에 가짜 별을 잔뜩 붙였다.





소은성 <친구들에게>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에 사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메일로 보내드리는 에세이 메일링입니다. 새로운 시즌 구독은 작가소개에서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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