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을 따라 흐르는 드로잉 – Automatisme의 밤
〈다이버시티 드로잉〉 4회차. 1회차에는 20분 집중도 어렵더니 어제는 2시간 동안 완전히 몰두해 그릴 수 있었다. 선생님의 선곡을 들으며 오일파스텔로 이것저것-아무거나-마구마구 그리고 난 밤, 귀갓길.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무념무상 행복하다. (나는 보통 유념유상의 상태이다)
계획도, 평가도, 긴장도 없는 세계.
그리고, 활자가 없는 세계.
화실 안 물건들을 그리다가, 폰에 담긴 사진을 보며 그리다가, 흔적 없이 기억 속에 있는 것도 그리다가.
그린 것. 아버지의 뒷모습. (어제가 기일이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과의 추억이 서린 음식. 너무 그리워서 쉽게 꺼내볼 수 없던 얼굴.
꺼내보기 두려운 것들을 꺼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색과 선과 면이었다. 샌드위치는 색의 조화가 예뻤고, 얼굴은 역시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무엇을’과 ‘어떻게’를 정하지 않고 그리기. 인식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
통제하지 않기.
이미 가진 틀로 세계를 지각하지 않기.
아는 것으로 능동적으로 구성하지 않기.
몰입과 우연.
감각과 경험을 신뢰하기.
세계를 그저 받아들이고 새로이 발생하는 흐름에 나를 놓는 태도.
인상깊었던 점. 내가 의도해서 선택한 대상보다, 어느 순간 완전히 몰입된 상태에서 우연히 본 대상을 그렸을 때 더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그릴 대상, 사용하는 재료, 그 순간의 몰입도… 여러 요소들이 겹쳐지는 그 순간은 내가 콘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배워가는 중이다.
결국 계속 그리면서, ‘그리는 몸’을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강의에서 말하길, 이는 ‘멋진 상대를 우연히 만나는 것(hasard)’과 같고, 혹은 ‘내가 좋은 태도로 관계를 맺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관계 속에서 그림은 그려진다. (le dessin se fait dans la relation)
“다양한 대상을 많이 그려보세요.
그리는 몸을 만드세요.
우연히 일어나는 충동을 따라가세요.
천천히, 자연스럽게, 멀리 가보세요.”
https://www.75jerome.com/diversity-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