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무리에 대한 참 이상한 강박
숱하게 본 케이스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을 이렇게 부르곤 한다. “우리 맘속에 초등학교 시절 일기장 검사하던 선생님이 아직 살아계셔!”
“정말 이상하네요? 내내 어머니를 창피해했고, 그로 인해 괴로웠다면서 갑자기 왜 사랑의 위대함으로 글이 마무리 되지요?” 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제가...그랬나요?” 잠시 머뭇대더니 이어서 말했다. “음...무의식 중에 그렇게 한 것 같아요. 어쩐지 아름답게 결말을 맺어야 할 것 같아서요.”
‘가장 사랑하거나 가장 미워하는 존재에 대해 쓰는 에세이’ 과제를 리뷰하던 시간이었다. 어머니에 대해 솔직하고 담담하게 그는 썼다. 유년 시절, 시장에서 리어카 끌며 장사하는 어머니를 마주치기 싫어서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곤 했다는 기억을 바로 어제의 일인 듯 묘사했다.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흔한 에피소드였음에도 묘사가 살아나니 쉽게 몰입됐다. 어둑한 골목길에 몸을 숨기고 어머니가 멀리 멀리 사라져 버릴 때까지 지켜보던 순간의 죄책감과 불쾌함,
그 길의 상세한 모양, 홀로 집에 돌아가며 느낀 미묘한 울분이 세세히 잘 나와 있었다.
어머니 캐릭터도 개연성이 있었다. (에세이는 논픽션이지만, 잘쓴 논픽션에는 픽션처럼 분명한 캐릭터 설정이 있다!) 글 속의 어머니는 ‘살아’ 있었다. 작은 일에 쉽게 욕하고, 큰 일엔 돌처럼 무감했다. 납득이 갔다. 하루 하루 버겁고 고단하면 말이 곱게 안 나가는 건 당연하잖아? 자식 사랑? 귀여운 게 다 뭐야. 짹짹거리며 입 벌리고 먹이를 달라는 아기새처럼 무서운 존재들. 살점이 떨어지듯 푹푹 비는 쌀독. 피로에 지쳐 돌아온 어머니를 반기는 건 각종 공과금 고지서들.
“난 원래 모든 엄마가 그렇게 무섭고 무뚝뚝한 줄만 알았다. 동화 속 어머니들처럼 다정하지도 않고 그토록 화만 냈을까. 지금도 화 잘 내는 사람 곁에 가면 무섭고 덜덜 떨린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하고 눈치를 보는데, 그게 다 엄마 탓인 것 같다.”는 문장도 와 닿았다. 그가 마흔을 넘긴, 소위 ‘삶을 좀 알 것 같은’ 나이라서 더 좋았을까. 그는 ‘나는 삶을, 어머니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하고 있었다. 고단한 삶을 살아냈으니 이제는 서로 보듬으며 살면 될 것 같은데, 여전히 어머니는 인생과 싸우듯 사신다고 안타까워했다. 전혀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해가 갔다. 때로는 남보다 가족을 더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고통이 모두 성숙과 성장으로 승화되는 게 아니라 흉터로 남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우리 엄마 생각나요. 저도 어릴 때 뚱뚱한 엄마를 창피해 했거든요.” “저도 여전히 아버지가 미워요. 가장 증오하는 대상과 매일 아침을 먹어야 해요.” 잘 쓴 글은 타인의 쓰기 욕구도 자극한다. 수강생들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았고, 가족에 대해 써 볼 용기를 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반포지효라 했다. 아, 아, 부모님의 사랑이란 하해와 같이 높다.” 와장창창. 모든 감동이 다 깨져 버렸다. 눈시울을 붉히던 한 수강생은 벙찐 표정이 됐다. ‘급마무리’였다. 여러 번 본 케이스였다. 과제를 검토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때다. 나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다가 ‘이제 슬슬 아름답게 끝날 때지!’ 하면서 글의 태도를 돌연 바꾸면 나는 소리친다. “우리 맘 속에 초등학교 시절 일기장 검사하는 선생님이 아직 살아계셔!”
나의 문장으로 시작했다가 남의 문장으로 마무리 되는 글들. 생크림 케이크 위에 빨간 체리처럼, 그럴 듯 하지만 맛대가리는 없는 마무리. 미담, 좋은 생각, 뜬금없는 결심과 다짐, 바른생활, 성경말씀, 공자님 말씀, 부처님 말씀 등 종류도 다양하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나 ‘행복한 동화’처럼 그럴 듯한 마무리 문장(이금희 아나운서의 푸근한 나레이션이 들릴 듯한!)을 집어넣는 것이다. 다짐형 문장도 흔하다. “~해야 한다, 나는 ~할 것이다, ~해야 마땅하다” 로 의지를 불태운다. 글의 흐름을 잘 따라가던 독자는 어안이벙벙해진다. 그 옛날 애국조회 때 지루하기 짝이 없던 교장 선생님 말씀 같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잘 안다. 우리는 글을 그렇게 배웠다. 내 어릴 적 일기장을 기억한다. 짜장면 짬뽕을 먹은 날도 돈 벌어다 준 아버지, 중국요리를 시켜 준 어머니에 대한 찐한 감사로 마무리했다. <안네의 일기>를 읽은 날엔 ‘안네처럼 꾸준히 일기를 쓰는 어린이가 되겠다고’ 다짐했으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날엔 산타 할아버지의 부지런함을 존경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시 앞전의 수강생에게 돌아가자. 그에게 물었다. 그 시절 몰래 골목에 숨었던 이야기를 어머니께 솔직하게 해보았냐고. 수십년 지난 일임에도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못난 자식이죠. 벌써 30년도 넘은 일인데 절대로 말 못하죠. 죽을 때까지 비밀이에요.” “방금 말씀하신 것 기억하시죠? 지금 말한 것을 고스란히 문장으로 쓰면 됩니다.” 문을 꼭 닫아야 할까? 열어놓아도 돼요. 아름답게 마무리 짓지 않아도 되어요. 정 안 되면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영원히 모를 것 같다’고 심정만 표현해도 돼요.”
그는 왜 솔직한 마음은 쏙 빼고 난데없는 사자성어와 ‘좋은 생각’ 류의 흔한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 지었을까. ‘지난 일인데 좋게 좋게 생각해’라고 우리는 말한다. 혹시 그런 강박이 글에 악영향을 준 걸까? 글에 고사성어나 격언을 나열하면 품격 있어 보인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실은...50대 이상에 특히 많다)
비슷한 사례가 많았다. 독박육아로 인한 남편에 대한 증오를 실감나게 써놓고는 “그래도 인연은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고 마무리 짓더라. 마음을 잠시 속이려 긍정 슬로건을 외치는 것이야 자유지만, 글에선 그러지 말자.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나는 글이 아니라 ‘말’을 해보자고 권한다. 노트북도 덮게 한다.
“남편이 여전히 미운가요? 용서가 되나요? 내가 너무 가여운가요? 그냥 친구에게 말하듯 투덜투덜 제게 털어놓으세요. 듣고 잊어버릴게요.” 아침마당 엠씨처럼 두런두런 말을 건네면 그제야 마음을 여는 수강생들이 고맙다. “지금도 울컥울컥해요. 제가 혼자 참 종종거리며 살았어요. 우리 남편이 전생의 내 아내였나 봐요. 제가 어지간히 속 썩이고 빚지고 바람 피운 남편인가 봐요. 제 팔자 제가 꼬았어요!” 그 말을 녹음해서 문장으로 정돈하니 재밌는 에세이가 됐다. 뜬금없이 공자님 말씀 인용하지 말자. 인간의 말을 하면 된다.
사회생활 하느라 쓰던 가면을 벗어야 한다. 누가 여전히 미우면 ‘아이고 미워 죽겠네!’라고 쓰자. 그러면 글이 펄펄 살아 뛰어다닌다. 살아있는 글은 독자를 건드린다. “당신도, 살아계시지 그래요?”라고 자극한다. 비싼 돈주고 간 여행이 지루했다면 ‘돈만 버렸다. 남들은 잘도 감동받던데 난 왜 이럴까’라고 어정쩡하게 끝마쳐도 좋다. ‘어정쩡 체’라고 부르지 뭐. 어쨌든,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거짓말 하지만은 말자. 철든 척, 다아는 척, 성인인 척 하지 말자. 글쓸 때만은 실컷 못나고 어리석고 뒨퉁맞아도 된다. 못나고 못생기고 멍청하고 후회하는 나를 솔직하게 보일 수 있는 대상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면 우리는 글쓰기를 더 사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