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표현의 치명적 매력

위에 쓴 제목도 상투적표현입니다

by 소은성

상투적표현은 편리하다. 편리해서 유혹적이다. 글로 먹고사는 작가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나도 보고 듣고 써먹어 본 게 많아서, 십년 에디터 경력으로 상투적표현 사전 한권쯤 너끈히 편찬할 수 있다. 어제 작가들과 나눈 대화를 조금 각색해 펼쳐본다.


“소개팅한다고? 사나의 보호본능 자극하는 매력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가 어딨겠어?”

“아미의 아찔한 각선미가 오늘 한층 돋보이는구나.”

“은성만 오면 한바탕 웃음꽃이 피네!”


다들 고단해 뇌를 쓰기 싫었다. 이럴 땐 상투적 표현을 ‘애용’하시길. 당신의 두뇌 에너지가 절약된 만큼 표현력은 날로 퇴보할 것이다.


수업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한드 대사나 찌라시 기사 예시를 든다. 내가 문장의 앞부분을 말하면 학생들이 뒷부분을 외치는 게임이다.


이건 너답지 않아! + 나다운 거? 대체 나다운 게 뭔데?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 이 결혼은 안 된다!

잔잔한 +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숨막히는 + 뒤태!


상투 상투 하니까 상투 과자가 먹고 싶다. 지겨우니까 용어를 바꾸자. 뻔한 걸 뻔하게 쓰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한도 끝도 없어서 영화나 드라마, 만화 등에서는 ‘클리셰’라고들 한다. 뻔한 이야기 흐름과 상투적 대사 등을 모조리 아우르는 용어다. 클리셰 수집을 위해서는 드라마를 몇 편 보면 편하다. 한 편에 출생의 비밀, 자동차 사고, 기억상실증 등이 모조리 등장하면 당신은 수퍼 럭키! 뿔테 안경에 뽀글머리를 한 여자, 알고 보니 초미녀? 근성을 가진 시골 운동 선수가 조기교육을 받은 명문가 엘리트를 꺾어버림(평창 올림픽 컬링팀처럼?) 가난하지만 씩씩한 여자가 재벌 3세를 만나 떡볶이, 순대, 오뎅 먹이기. ‘전형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최근작으로는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가 미칠 듯한 클리셰 덩어리라 들었다. 최근, 한국에서 천만영화가 되기 위한 필수 요소로는 ‘클리셰 뒤범벅’이 있다.


다시 글로 돌아와서. 상투적표현 과제를 할 때, 소위 ‘찌라시’라 불리는 인터넷 기사는 황금밭이다. 지난 주 클래스에 수강생들과 3분간 찾아낸 것들이다.


귀추가 주목된다: 귀추라는 단어가 재밌다. 진지한 수업 시간에 나 혼자 귀두와 고추를 떠올려.


~아니었을까: ‘그것이 알고싶다’ 김상중 톤으로 읽게 된다


~의 미래가 기대된다: 마감 5개가 하루에 걸려있던 날, 인터뷰 마무리로 써 먹어버린...


~주목된다: 진짜로? 누가? 내가? 대중이? 기자라면, 그 주목을 누가 하는 건지, 얼마나 주목되는 건지 써야 하지 않나. 이건 정말 생각 안하고 자주 쓰는 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얼마나 잔잔한지 수치로 표시가능한가? 쓰기 전에 생각했나요?


~의 진수: 호러의 진수, 로코의 진수...반복하다보니 누구 이름 같다. 진수...이 말도 한물감.


쥐꼬리만한 월급: 처음 누군가 ‘발명’한 말이겠지. 쥐꼬리 본 적 있나요? 봤으면 써도 된다. 당신의 월급에 대해 새로운 표현을 고안해 보라.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VJ 특공대’ 톤으로 읽힌다. 써도 되지만....이제 좀 다른 표현 없어요?


뼈를 깎는 고통: 뼈 깎아 봤나요? 내 고통이 정말 그 정도로 고통스러웠는지, 생각은 좀 해보자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인기리....인기리....계속 읽다보니 좀 이상해


여름 스크린 대전… 누가 웃을까?: 복사-붙여넣기


인생템, 인생드라마, 인생샷: 한물 갔음2


청정 자연을 품은 휴양지: 여행기자로 KTX매거진과 모닝캄에 연재할 때,이 악물고 한번도 안 쓴 말


한국의 베니스:....여기 어딘지 알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잠시 입이 열 개인 얼굴을 상상해보고 오싹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000의 향후 활약에 눈길이 쏠린다: 알~겠습니다~


이상한 현상이 만연하다. 그러면 ‘왜’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니까, 대체 왜들 그래요? 재봉틀 돌리듯 쉼없이 마감해야 해서? 소싯적에 나도 하루에 10개씩 기사를 뽑아낸 적이 있다. 고백한다. “이번 한번만...”하면서 엄청 가져다 썼다.


이유는 또 있다. 클리셰를 사용하면 빨리 읽힌다. 너무 빤해서 예측이 쉬우면 독해에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 드라마에 왜 클리셰가 난무하냐고? 살림해 보니까! 믹서기 세탁기 진공청소기 돌리면 드라마 대사가 잘 안 들리더라! 빨래 널고 설거지 하고 그릇 정리하고 하려면 계속 왔다갔다 한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건 사치다.

그러니 몇 장면 빼먹어도 다음 스토리 이해에 어려움이 없어야 하는 게 드라마(특히 아침드라마)의 서글픈 데스티니. 연예 기사도 마찬가지다. 손예진과 정해인의 키스신에 관한 기사를 누가 진지하게 읽겠어!


판에 박힌, 식상한, 상투적인, 뻔한, 전형적인, 클리셰. 뭐라고 불러도 좋다. 클리셰란 해당 문화에 익히 누적된 것이기에 대중의 이해가 빠르다는 점이니 비하만 할 순 없다. 그러나 클리셰, 그중 상투적 표현을 피하는 건 작가로서 남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호랑이가 무섭다’는 사실을 너까지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단다.” 이제는 세상을 떠나신 나의 글 스승님이 주신 메시지다.


자, 이제 결론내자.


솔루션을 주겠다.


첫 번째, 농담에 써먹든가. 친구가 너무 감동 없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면 “이야.. 내 맘에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일렁인다”라고 농담하자. (쓰고보니 재미없네) 개인적으로는 에세이를 쓸 때 종종 애용한다. 상투적 표현을 비틀어 위트로 쓰는 것.


두 번째, 이해한다. 당신이 보고서와 보도자료와 홍보기사와 드라마 리뷰와 페이스북 포스팅 등을 다뤄야 하는 직업이라면? 먹고살기 위해, 독자의 눈에 띌 상투적 표현을 써야만 한다면? 맘놓고 맘껏 써라. 그런다고 당신의 글솜씨가 퇴보하지 않는다고 믿어라. 먹고살기를 위해 타협하라.


다만 혼자가 되었을 때, ‘나의 문장’을 쓰는 시간을 단 5분이라도 가지자. 야근 후 돌아온 고단한 밤이면 더 좋겠다.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좋겠다.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 창의적인, 내 맘에서 우러나온 문장을 쓰자.

그럼 그 글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꾸물꾸물 혼자서, 이런 툴을 고안했다. 매일 밤 10시 글을 쓰고 싶도록 자극하는 '질문'이 올라간다. 사람은 물어보면 뭐든 답을 하게 돼 있다. 글감을 고민할 시간도 없이, 답을 쓰라. 5분 걸린다. 그러면 짧은 에세이가 완성된다.


효과는, 보장한다.

https://www.facebook.com/IlsangKamkak/posts/812720125519226


마지막으로 내가 사랑하는 우리 엄마의 표현을 소개한다.

“야, 신경 꺼. 신경 꺼. 니 팔 니가 흔들고 내 팔 내가 흔들지.”

(친구와 전화 통화하며 자신의 일에 신경쓰지 말라고 화를 내는 상황에서) 발명한, 엄마만의 새로운 표현이다.


"네 팔 네가 흔들고, 내 팔 내가 흔들자."

이제 우리 가문의 교훈이 된 이 문장이 전국민의 상투적 표현이 될 때까지,

내가 최선을 다해 사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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