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글쓰기 교육에 대하여

작가에게는 '중간 문장부터 대충 쓴다'는 마음이 일단은 도움된다

by 소은성



소설가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첫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쓸 때, 조사 ‘은’과 ‘이’를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강의 중에 하면 수강생들의 어깨는 더 딱딱해진다. 걸출한 작가들의 첫문장 앞에서 자신감은 바닥을 친다. 끙끙 앓으며 하얀 창을 노려보지만 답이 안 나온다.



흰 종이에 얼룩을 만들 듯

국문과 재학 시절 시쓰기 수업을 들었다. 5월이 되자 결석생이 절반을 넘었다.

“백지공포 때문에 한 줄도 못 쓰겠어요.”

친구는 울먹거렸다. 시상이 활자로 고정되면 초라하게 보일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온 교실을 물들였다. 교수님이 조용히 웃었다.

“백지가 무서워요? 그럼 점을 하나 찍으세요.”

점을 하나 찍자. 그러면 더 이상 백지가 아니다. 그러면 공포는 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여러분의 새하얀 종이는 이미 망쳐졌어요. 그러니 더 이상 무엇을 두려워하겠어요?”


“막나가는 태도 없이 어떻게 글로 먹고 살려고요?”

기억하자. 지금 쓰는 첫문장이 독자에게 선보이는 첫문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인간이 어떻게 집필 처음부터 대단한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는가.



첫문장은 쉽게 휘갈기자. 아무렇게나 써 버리자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문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아.무.말.이.나 쓰는 것도 괜찮다.




나는 종종 “나는 지금 첫문장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는 식의 진짜 뻔하고 진짜 재미없는 디폴트값을 만들어 두고 글을 이어나간다.


첫문장에 대한 글을 쓰려는데 진짜 안 써지네.”처럼 ‘진짜 아무말’이나 쓴다.

많은 경우, 글을 쓰는 중에 기발한 첫문장이 뿅 떠오르기 때문이다.


중간문장을 끌어올려 첫문장으로 삼는 경우도 아주 많다. 두려움 없이 초고를 써나간 뒤 퇴고 과정에서 첫문장을 길어올리면 된다는 이야기다.


첫문장 쉽게 쓰는 좀 이상한 방법들

첫문장이 왜 어려울까. 자기통제, 자기검열 등의 심리와 연관돼 있지 않을까. 당신이 그러니까 첫문장을 쓰려고 망설이고 있다면 당신 머릿속의 ‘의심’이와 ‘두려움’이가 ‘용기’와 싸우고 있는 상황인 거다.(<인사이드아웃>을 떠올리시라) 그럴 땐 다음의 방법을 따라해 보자. 글쓰기 공포가 정말 심한 분만 읽으시라. 기존 글쓰기 책에 잘 안 나오는 것만 모았다. 뭐 하나는 걸리겠지.


1 술의 마법

참이슬 병을 책상 한켠에 소중히 두는 동료. 맑은 소주 한 잔이 첫문장이 풀려나오게 한다나? 나도 한때는 캔맥주를 곁에 두고 글쓴 적이 있다. 기술 기사를 쓰다가 갑자기 내면을 펼쳐놓아야 하는 감성 에세이를 쓰려면 상태 전환이 어려워서 그랬다.


경험해 보니, 술 한잔은 ‘긴장과 부담 없애주기’의 기능만 한다. 딱 고 정도만 한다. 사회 속에서 생활인 모드로 살아가느라 꽁꽁 감춰둔 내면의 문을 열어주는 정도? 취하면 영어 잘되는 것과 비슷하다. 원래 가지고 있는 실력이 나오는 것일 뿐 없는 감성을 만들어주는 건 아니다.


알딸딸해져서 쓴 글은 의외로 별로 좋지 않았다. 논리가 없고 막 나가서 지면에 실을 수는 없었다. (어쩐 일인지 숙취에 쩔어서 5분마다 누웠다 다시 일어나며 죽을동살동 쓴 기사는 너무 좋았다고 칭찬받은 적이 있다. 왜죠?)


2 눈높이 낮추기

씨네 21 김혜리 기자의 오랜 팬인데 그녀의 책을 읽고 난 후면 기사가 그렇게 안 써지더라. 이후에는 내 글쓰기 전에는 일부러 후진 글만 골라 읽곤 했다.

“세상에 후진 게 이렇게 많네. 나는 저것보단 낫네” 싶어 잘 써지더라.


3 리액션 요정과의 수다

수업 때 글쓰기 공포가 너무 심한 이들에게 쓰는 특효약. 여행기사라고 치자. 나를 친구라 여기고 반말로 여행 중 느낀 걸 말해 보라 한다. 처음엔 어색해 하다 한명이 선방을 하면 다들 앞다투어 한다. 그러면 “교토가 왜 좋아? 좋은 이유를 단어 3개로 말해 봐. 내가 그 단어를 이어서 첫 문장을 만들어볼게.”라며 도와준다. 수강생의 수다를 녹음해서 (약간 편집해) 문장으로 만들어 칠판에 써 보이기도 한다.

응용편: 무조건 내 말에 호응 잘하고 재밌다는 듯 리액션해주는 상대와 수다를 떨고 녹음해서 녹취 푼 후 문장으로 만들기


4 필사는 감정 기복을 잡아준다

책상 위에 잡지, 광고지, 시집, 소설책 등을 마구 늘어놓고 문장들을 베껴온다. 나만의 ‘가짜 첫문장’이다. 그 중 내 맘같은 문장을 골라 첫문장으로 삼고 첫문장으로 우뚝 세우고 글을 전개했다. ‘음...내가 만든 문장보다는 멋있게 보이는군’ 싶어 마음의 안정이 온다. 신나서 쓰다 보면 어느새 글이 완성돼 있더라.

나중에 글쓰기 책을 읽어 보니, (나처럼)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은 집필 이전에 기복을 잡는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럴 때 필사가 좋다고 했다.

“아, 그게 필사였구나. 나도 모르게 필사를 했구나.”

선 실습 후 이론이었달까. 내 방법이 틀리지 않았구나, 깨달았다.


나는 불안증과 산만함이 심하다. 그래서 필사의 여러 장점 중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감정 기복을 잡는다’의 덕을 많이 보았다. 글을 쓰기 전엔 무조건 필사부터 하며 손가락을 풀었다. 멋진 문장들을 베껴 쓰다 보면 멋진 작가가 된 기분이 되었다. 수준 높은 문장을 받아적다 보면, 내가 그 문장의 주인이 된 것 같아 자신감이 올라갔다. 지금도 초보 수강생들에게 가장 추천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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