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배된 말

by 황은솔

그렇게 쉽게 말해선 안 되는 거였다.


몇 마디 말을 남기고 그가 나간 후 통증이 지속되고 있다. 한 동네에 살고 장사도 같은 동네에서 하니 앞으로도 얼굴을 계속 보고 살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미국으로 이민이라도 가야 하나.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은 주변 사람을 보며 힘을 낸다고들 했다. 나도 그랬다, 한때는. 사람들과 왁자지껄, 함께 오징어를 씹으며 보드게임을 하고, 매출이 반토막이 났지만 오늘 번 돈보다 더 비싼 저녁을 사 먹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교외로 나들이를 나가고. 그러다 한 순간, 그 순간이 온 거다. 무너짐의 순간이. 한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거창한 공격이나 악의에 찬 비난이 필요한 건 아니다. 무심코 던진 한 마디의 말, 미처 진심을 숨기지 못한 찰나의 눈빛. 1초 만에 사람은 무너진다. 자신만의 동굴로 걸어 들어가 고통스러울 만큼 큰 힘을 발휘해 거대한 바위로 동굴 입구를 막고 스스로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당신이 날 죽이게 두지 않겠어, 그러기 위해선 내가 날 죽여야 해, 하면서. 한 번 막혀버린 동굴의 문은 사람의 힘으로는 열 수 없다. 나도 당신도 그 누구도 열지 못한다.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딱 두 가지뿐.


책과 약.


책과 약은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다. 먼저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나는 죽지 말아야지 다짐을 한다. 약을 얻기 위해서는 의사에게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죽지 않게 위해서가 아니라, 그만 아프고 싶어서 먹은 약은 결국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게 한다. 대단한 소명을 가지고 책방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의사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한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평가가 두렵고 내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진 않을까 두렵다.


바람이 분다. 낯설고 좋은 냄새가 실려온다. 꽃 향기일까. 꽃을 사본 적이 언제였더라. 가난하고 가진 것 없어도 철마다 계절이 보이는 꽃 몇 송이 정도는 화병에 꽂아둘 수 있는 삶이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누군가 인생은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나침반도 없이 홀로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삶에 대한 숱한 정의들 중에 가장 공허한 정의가 아닐까 싶다. 내부 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화가 눈물이 되어 흐를랑말랑, 화가 나면 왜 눈물부터 나려고 하는 걸까, 그 원리에 대한 책이 있을까, 찾아 읽어보고 연구해봐야지, 루틴 같은 생각의 흐름 중간에 문득 삶은 이렇게 힘든 건가, 나만 이렇게 사는 게 지겨운 건가, 인생은 항해가 아니라 고역, 이라고 해야 맞는 게 아닐까.


이마가 아파 왼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눈앞이 핑글, 쏟아질 것만 같다. 어지러울 땐 차라리 종이에 찍힌 글자를 본다. 읽지 않아도 그저 보고만 있는다. 다음날 마실 커피를 생각하며 죽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어느 소설가가 떠오른다. 삶의 이유도 가지가지, 물리학 공부를 시작해보아야겠다. 만물에 온갖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에 신물이 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이 이렇게나 귀한 것이었나. 목부터 등허리까지 짐을 가득 싣고 매일 같은 산길을 오르내리는 나귀가 된 심정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다녔던 영어 교습소가 있었다. 선생님의 가정집 방 하나와 거실 공간 일부를 교습소로 꾸며놓고 일주일에 두 번 학생들이 정해진 시간에 찾아가 언어를 배우는 곳이었다. 영어를 교과목이 아니라 언어로 가르치는 곳이었는데, 학문으로서의 영어 문법을 공부했던 만큼이나 영어권 문화의 현재와 과거, 태생부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 용납되지 않는 실수, 영어식으로 생각하는 법에 관해 배우곤 했다. 교재도 영어 교과서나 참고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의학서, 식물의 성분에 대한 책, 곰돌이 푸우 동화책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여러 가지 책을 사용했다. 삶의 무게에 대해 이야기하다 이게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린가 싶다. 문득 선생님이 생각이 났다. 이번에 동굴 문을 열어주는 건 그때 지금의 내 나이였을 내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그래서 가끔 시샘하고 미워하기도 했던 영어 선생님의 말이라서.


"무작정 잘해야겠다, 달려들지 말고 차근차근 근본부터 되짚어 봐. 뿌리를 먼저 찾고, 거기에서부터 밑동을 지나 줄기, 가지, 잎으로 뻗어나가야 해. 잎에서부터 시작하면,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지고 다시 새 잎을 찾기를 반복해야 하잖니. 뿌리부터 튼튼하게 가꾸면서, 잎을 무성하게 틔워보자."




NOT JUST WORDS.

낫저스트워즈는 일종의 실험입니다. 단어를 그러모아 일련의 번호대로 나열한 후 순서에 맞게 문장에 배치하며 한 편의 글을 완성합니다. 밖에서 찾아낸 단어로 안에 있는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까, 아무 상관이 없는 말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질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주워온 단어들이지만 이마저도 스스로 골라 적었기에 아직 완벽한 실험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함께 실험할 사람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