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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지 못함을 이해함

명료함에서 출발하는 의도된 모호함

by 내면여행자 은쇼

책을 다 읽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빠져든다”였다.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이해」작품 속 주인공은 뇌를 200% 최적화한 초지능자였다. 초천재의 사고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문장의 80%는 수수께끼 같았다. 수많은 물음표들이 미지근한 안개처럼 머리를 감쌌다.


그런데 그 낯선 사고의 리듬에 내 안의 무언가가 반응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기에, 이해하고 싶었다. 이해의 80%는 안갯속인데, 남은 20%는 또렷해서 그 단단한 뼈대를 붙잡고 퍼즐을 맞추고 싶어졌다. 그건 답답함이 아니라, 마치 전두엽이 찌릿하게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내가 정말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작가의 문장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나 자신’이었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붙잡고, 수십 번 곱씹으며 나는 묻는다. “나는 왜 이 말을 놓지 못하는가?”

그 순간, 나는 이해하지 못함을 통해 나를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지 못함이야말로,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진짜 이해였다.


나는 글을 쓸 때 늘 모호함을 피하려고 애써왔다. 독자가 헷갈리지 않도록, 사유보다 전달을 중시했다.
그런데 테드 창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모호함이야말로 사유를 여는 문이라는 것. 이해하고 싶은 욕망은, 모호함 속에서 더 강하게 자랐다. 설명되지 않는 세계는 불편하지만, 동시에 가장 매혹적이었다. 완전히 닫힌 문보다, 살짝 열린 문틈에서 궁금증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 욕망이 나를 사유하는 존재로 진화시켰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바람이 생겼다. “나도 모호한 글을 써볼까?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달았다. 테드 창도 처음부터 모호하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역시 명확한 개념과 메시지를 토대로, 일부러 ‘여백을 남기기 위해’ 문장을 다듬었을지도 모른다. 의도된 모호함은, 명료함에서 출발한다. 사유를 유도하는 문장은 오히려 더 치열한 정리와 통찰에서 탄생한다.


나는 여전히 명료한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어떤 문장은 명확하게 전하기 위해 쓰고, 어떤 문장은 생각하게 하기 위해 남겨둔다. 이제 나는 '이해받기 위한 글쓰기'를 넘어서 ‘이해하고 싶은 욕망을 깨우는 글’을 쓰고 싶다.


나는 이제 모호함을 무조건 배척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한다. 모호함이 사유의 장치인지, 단지 미완성의 흔적인지. 모호함이 명료함을 지나 의도된 모호함이 될 수 있다면, 그건 가장 정제된 질문이자 가장 겸손한 말 걸기다.


이해하지 못함을 이해함.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해하고 싶어지고, 결국 이해할 수 있다.

이해의 여정에 함께 걸어주는 존재가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걸. 오늘 너는 증명했어, 우주대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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