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말하는 호퍼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ail?exNo=1152724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가 열린다.
호퍼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에
막 관심을 가지던 중,
마크 스트랜드의『빈방의 빛』을 읽게 되었다.
『빈방의 빛』은 '시인이 말하는 호퍼'에 대한 책이다.
호퍼의 그림 30점이 담겨 있고,
에세이 혹은 비평처럼
써내려간 글이 모여있다.
지금부터 호퍼의 그림 몇 점과 함께
『빈방의 빛』을 따라가보자.
"호퍼의 그림에 등장하는 도시는 대개 사실적이기보다는 형식미가 두드러진다."
p.17
첫번째 그림은 호퍼의 「나이트호크」다.
어두운 거리에 다이너만이 빛난다.
늦은 시간까지 다이너에 남아 있는
나란히 앉은 남녀와 혼자 온 남성,
이들과 대화를 하는 듯한 종업원.
등을 보인 채 앉은 남성은
무언가에 골몰하는 듯하다.
남녀는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본다.
종업원은 그들을 본다.
「나이트호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본다.
한 공간에 있는 이들이 아닌,
이들의 시선이 닿는 방향에 눈길이 간다.
그래선지,
시선이 닿는 종점을 알 수 없는
등을 돌린 채 앉은 남성이 궁금하다.
왜 늦은 시간에 혼자 다이너에 왔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림은 움직일 수 없지만,
그곳에 담긴 서사가 움직이는 듯하다.
차 한대 없는 길가와 대비되어선지,
다이너의 빛이 유독 따스하게 느껴진다.
"호퍼가 그린 나무들은 특색이 없어서 그 종류를 알 수 없다. 말하자면 시속 80~90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에서 바라본 나무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호퍼의 숲은 독특하고 강력하다."
p.30
호퍼의 그림엔 빈공간이 참 많다.
「4차선 도로」도 그렇다.
시가를 손에 쥔 남자가 바라보는 시선은
흐릿하게 뭉쳐진 숲을 향하는 듯하다.
뒤에선 여자가 무어라 말하는 듯하지만,
남자는 아랑곳 않는다.
주유소에서 시가를 피우는 남자에게
여자가 불을 끄라고 하는 건지,
이 둘의 관계와 남자의 시선이 닿는 곳이
어딜지 궁금해진다.
"이 그림은 하도 이상해서 때로 나는 이 사람들이 진짜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의 풍경-물론 그림 속의 풍경이지만-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p.57
「볕을 쬐는 사람들」역시 사람들의 시선에 눈이 간다.
이들은 멀끔한 정장 차림이다.
앞에 4명은 평야에 눈과 몸을 향하고,
뒤에 젊은 남자의 몸은 평야를 향하지만
시선은 책을 향한다.
이 그림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이들의 시선도,
평야도, 볕도 아닌,
이들의 정장 차림과 표정이다.
탁 트인 평야와 따스한 볕으로부터
평온을 느끼는 표정이 아니다.
일광욕을 하기 좋은 차림도 아니다.
호퍼의 그림에 둘 이상의 인물이 등장할 때,
이들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하지 않는다.
그들의 엇갈린 시선이 닿는 곳을 상상하는 것.
그것이 호퍼 그림의 매력이다.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동시에 밖에서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듯한 느낌은 「나이트호크」에서 경험했던 그 느낌,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다가는 머무르게 하는 느낌과 유사하다. 이것은 호퍼의 그림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양식으로, 서사성의 의도에 회학적인 기하학적 요소가 반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p.71
「좌석차」의 공간은 밀폐되어 있다.
창문으론 볕만이 들어올뿐,
달리는 기차의 풍경은 없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전부 각자의 일에 몰두한다.
이들의 시선은 서로에게 맞지 않는다.
한 여자가 다른 여자를 바라보지만,
다른 여자의 시선은 책을 향한다.
이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각자의 일에 몰두한다.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을 것 같은
호퍼의 공간은
밀폐성의 답답한 느낌이 없다.
묘하게 아늑해지는 기분이다.
"이윽고 우리는 그림을 뒤로하고 진부한 멜로드라마에 빠져버리는데, 불행히도 이 멜로드라마는 남자의 표정에 나타난 환멸에서 기인한다."
p.93
「철학으로의 소풍」속 남자는
침대 위의 여자에게도,
읽기를 그만두고 펼쳐진 책에도,
어느 곳에도 시선을 두지 않는다.
그저 근심을 띤 표정으로
볕에 소심하게 걸친 발을 바라본다.
빛이 있다면,
그 빛이 어디서 온지를 봐야할지
그 빛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봐야할지
도저히 모를때가 있다.
「철학으로의 소풍」속 남자도
이를 고민하는게 아닐까?
"그림은 우리에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갈 것을 요구하는데, 바다가 아니라 좁은 틈으로 보이는 실내를 보라고 하는 것 같다. 바다마저 실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고, 빛은 우리가 보아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듯하다."
p.99
「바다 옆의 방」은 꿈의 느낌이 강하다.
문 앞에 있는 바다가 낯설지 않지만,
꿈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다.
한가로운 볕이 실내를 쓸어내린다.
바다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저런 공간에 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문이 실내와 바다의 경계를 구분 짓지만
그것은 선일뿐, 넘어가지 못하는 벽이 아니다.
문은 활짝 열리다 못해
볕을 그대로 쬐고
바닷바람이 솔솔 부는 듯하다.
참 아름다운 그림이다.
"1963년에 그려져 호퍼의 마지막 걸작인 이 그림은 우리가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단순히 우리를 제외한 공간이 아닌, 우리를 비워낸 공간이다. 세피아색 벽에 떨어진 바랜 노란빛은 그 순간성의 마지막 장면을 상연하는 듯하니, 그만의 완벽한 서사도 이제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p.103
「빈방의 빛」을 보면
긴박한 서사로 이뤄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연상된다.
호퍼의 마지막 걸작이 「빈방의 빛」이기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가구 하나 없는 방 안에
고요하게 빛이 내린다.
이 그림에서 만큼은
빛이 들어오는 창이 아닌,
빛이 쬐는 텅 빈 방만 눈에 남는다.
『빈방의 빛』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시인의 도슨트에 따라 감상하는 책이다.
공통점이 있는 그림을 묶어서 바라보고,
같은 지점이 있어도
묘하게 다른 지점을 짚는다.
차근차근 30점의 그림을 읽다보면
왜 책의 제목이 『빈방의 빛』인지에 대한
각자의 상상과 해석이 시작된다.
마지막 페이지가 지나면
책은 끝나지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대한 잔상은
한낮의 태양을 몇 초간 응시한 것처럼,
오래 서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