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수달 Oct 19. 2024

석양의 남자


석양이 지는 길을 그 남자는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 쓸모없어지면 저렇게 버려지겠지?'


매일 걷던 길인데도 그날따라 드문드문 떨어진 낙엽이 마치 자신의 모습 같았다.


'쓸모없다고 해서 버려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와 그는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휘익, 하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월급은 점점 내려가고,

야근 수당은 나오지 않았고,

휴일도 사라졌습니다.

목소리를 잃어 노동청에 신고도 못 하게 된 인어 공주는

사회의 거품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일본에서 유행하는 사축동화, <1% 비주얼 씽킹>에서 인용함.



연차가 쌓여도 월급은 오히려 내려가고, 죽어라 일해도 수당을 받지 못한 채 그는 하루하루 시들어가고 있었다. 돌파구를 찾고 싶었지만,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려고 몇 백만 원이나 되는 암표를 사고, 일 년에 한두 번은 해외로 떠나고, 주말마다 가족들과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은 그와는 분명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의 삶이 처음부터 암울했던 건 아니다. 흑수저로 태어나긴 했지만, 착실히 살면서 회사에서 인정도 받고 돈도 조금씩 모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자가 떠나고, 쉽게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면서 그의 인생도 석양처럼 저물기 시작했다. 


그의 병명은 '복합부위통증증후군' 신체의 한 부분에 극심한 통증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으로, 외상 등으로 인해 손상을 입은 부위에 훨씬 심한 통증이 나타나고, 통증이 지속되면서 여러 2차적인 다른 증상이 발생하는 질환을 말한다. (서울아산병원 홈페이지에서 발췌함)


"그래도 죽는 것보단 사는 게 낫지 않아요?"

"이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보단 죽어서 고통을 못 느끼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는다는 얘기가 쉽게 나와요?"

"쉽게 하는 말 아니에요. 반나절 만이라도 고통 없이 살아보고 싶어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부러울 것이 없던 한 남자가 암에 걸렸는데 완치되었다는 얘기, 기적처럼 통증이 완화되었다는 얘기도 그에겐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살고 싶다는 농담'을 던지기엔 그의 몸과 마음은 불이 꺼진 숯처럼 바스러지기 직전이었다.


'한없이 걷다 보면 언젠가 석양과 하나가 될 수 있겠지.'


타로 카드에 나오는 'The Sun'처럼 주위를 환하게 비추지 못한다면, 석양 속으로 사라져 우주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티라미수와 에프킬라가 만났을 때 4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