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챕터의 시작
폭풍 같던 지원 과정이 막을 내렸다. 마지막 지원서의 제출 버튼을 누르자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 이미 성큼 와있던 겨울과 함께 숨 막히는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 끝없는 기다림 속에서, 지원 준비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지난 몇 달간 아슬아슬하게 버텨왔던 회사 생활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회사에서 맡은 업무는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공사 견적과 실행 예산을 편성하는, 한마디로 회사의 자금과 직결된 일이었다. 작은 실수 하나가 입찰 실패로 이어지거나, 실행 예산 부족으로 현장에 큰 손해를 끼칠 수도 있는 책임이 무거운 업무였다. 유학 준비와 회사 일을 병행하는 동안, 솔직히 나는 온전한 정신으로 일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잠이 너무 부족해 머리가 늘 몽롱했고, 아무리 카페인을 쏟아부어도 집중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이러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늘 두려웠다.
결국 한창 지원서 마감에 열을 올리던 무렵, 팀원들에게 유학 준비 사실을 털어놓았다. 혹시라도 제 불찰로 업무에 차질이 생길까 염려되어, 중요한 사안은 선배님들께서 한 번 더 살펴봐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솔직히 양해를 구했다. 너무나 좋은 팀원들을 둔 덕에 다행히도 다들 따뜻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었다. "나도 애만 없으면 도전해보고 싶을 텐데.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런 결심을 했다니 정말 대단하네. 부럽다. 꼭 성공해!" 그 말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이번 해에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절박했다. 일 년을 더 이렇게 팀원들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미 회사에 유학 의사를 밝힌 이상, 도전에 실패하고 원래의 자리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가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분명 회사에는 소문이 쫙 퍼졌을 테고, 사람들은 내 뒤에서 '김 선임이 과연 하버드에 갈 깜냥일지' 자기들끼리 점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정말 가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놀고 싶고, 푹 쉬고 싶을 때면, "지금 뭣이 중헌데"라고 되뇌며 다시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아니라, 내 인생의 다음 페이지를 여는 일이었다. 나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진짜 친구라면 지금의 나를 당연히 이해해 줄 터였다. 나중에 혹시라도 모든 학교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그때 그 약속 나가지 말고 포트폴리오나 더 준비할걸. 그때 조금 덜 자고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울걸.' 하는 후회는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든 그냥 정말로 최선을 다 하고 나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원서 제출을 완료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태평양 건너 어딘가를 떠돌았다.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속으로는 타들어 가는 나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혹시 이메일이 와 있을까 가슴 졸이며 핸드폰을 열었고, 밤에는 불합격 통보를 받는 악몽에 뒤척이다 깨기 일쑤였다. 애써 태연한 척 업무에 집중하려 해도, 머릿속은 온통 발표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출근길, 여느 때와 같이 셔틀버스에서 쪽잠을 자다 늘 그렇듯 회사 근처 구불구불한 커브 길에서 귀신같이 눈이 떠졌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하자, 낯익은 그러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발신자의 이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다. 하버드였다.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열자, 시야를 가득 채운 'Congratulation!'이라는 단어.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맞은 땅처럼 온몸의 세포가 환호성을 지르는 듯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지원한 네 군데 학교 중 총 세 곳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고, 나는 주저 없이 Harvard Graduate School of Design의 MLA 1 AP 과정을 선택했다. 그렇게 2017년 가을학기, 나는 다시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캠퍼스로 돌아가게 되었다. 삶의 새로운 챕터를 여는 새로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