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사람만 바뀌었을 뿐.
이번 글에서는, 해외취업을 꿈꾸는 분들 중, 특히나 타지 생활경험이 없을 때 해외생활에 대해 막연히 환상을 가질 수 있는 내용들에 대해서 현실을 좀 더 적나라하게 알려줘보고자 한다.
어떤이에게는 이게 현타의 계기가 될수도, 혹은 전략변경, 또는 더 도전정신을 불태우게 하는 계기가 될지 모르겠다. 어떤식으로 어떻게 소화하든, 그것은 독자들에게 달린 일이다.
목차
1. 해외 직장생활의 장점
2. 해외 직장생활의 현실
일단, 개인적으로 느낀 장점에 대해 먼저 써보고자 한다.
a.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다.
그렇다. 이전에 영국 채용 프로세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 글에서도 언급이 되었었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독립적인 한사람의 구성원으로'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이곳도 대기업/중소기업/스타트업 등 회사 규모, 내지는 그 회사의 문화에 따라 세세한 건 천차만별이겠으나, 확실히 '내 허락없인 함부로 손대지 마' 식의 (흔한) 한국문화에 비하면 여기선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작업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알아서 해야 하는 환경에 더 가깝다. 나는 내가 직접 모든 일에 부딪쳐가며, 깨지고, 부서져가더라도 몸소 학습하는 그 과정이 잘 맞는다면 어떤면에서는 시도해봄직 하다.
b. 한국을 넘어 더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
미국의 뉴욕이나 캐나다 등 다른 나라도 물론 그렇겠지만, 런던은 글로벌 도시로 한국에 비하면 훨씬 더 각국/문화권에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위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순수하게 영국에서 나고자란 사람들로만 구성된 회사는 오히려 찾기 어렵고, 대부분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와서 N년차인 런더너들이 수두룩 빽빽하다. 이는, 어찌보면 한국, 아시아를 넘어서 색다른 직장문화나 사고방식, 일하는 방식을 익히고자 한다면 또 한번쯤은 경험삼아 일해볼만 하다고 볼 수 있다.
c. 휴가로 유럽여행도 꿈꿔볼 수 있다.
영국은 얼마전까지 EU의 회원국이었으니, 지리적으로 당연히 가깝기 때문에 한국에서 살 때보다는 1주일 남짓 되는 짧은 휴가 기간이어도 최소한 암스테르담이나 파리 등, 인접국의 주요도시 몇군데는 휙 둘러보고 올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속해있어서 좋다.
그런데,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가장 큰 매력을 느끼지 않을까 싶은데(나도 이건 여전히 큰 혜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직장생활의 장점으로 보기에는 큰 상관관계가 없는 내용이긴 하다. (그래도 적어봤다. 왜냐고? 내맘이다.)
d. 휴가신청이 자유롭다.
아, 근데 이건 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단 휴가자체를 쓰는데 있어 사유를 뭐라고 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필요가 없다. 그렇게 고민할 정도의 디테일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주어진 기간 내에서 합법적으로 쓰고자 하는거라면 웬만하면 다 승인해주기 때문이다. 단, 최소한 1주일 전에는 미리 알려준다.
하지만 회사가 곧 중요한 프로젝트나, 혹은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앞두고 있는데 갑자기 2주, 3주 이렇게 휴가를 왕창 쓰려고 하면, 이건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좀 라인매니저(직속 상사)와 사전 논의가 필요하다. (내가 생각해도 갑자기 3주 휴가 신청내는데 그것도 바로 3일뒤.. 이러면 좀 양아치 같을것 같다. 물론 내 관점이지만.)
아무튼, 외출또한 필요하면 1-2시간 쯤 급하게 내는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회의와 겹치는데 응급한 일이라면, 그건 자기가 알아서 잘 조율하거나 미리 양해구해놓고 다녀오면 된다.
내가 평소에 행실을 X지같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굳이 건들지 않는다.
사실 이부분이 이번 글의 메인디쉬다.
a. 휴무일에 대한 환상은 너무 크게 갖지 않는 것이 좋다.
어쩌면 아닌 회사도 있을수 있다(언제나 예외가 존재함을 잊지 말자). 하지만 중소기업 규모 정도로 봤을 때, 보통은 공휴일 외에 개인적으로 1년 만근 시 주어지는 최대 휴일은 25일인 경우가 거의 대다수였다.
사실 휴가에 대한 정책은 회사마다 조금씩 다를 수도 있어서, 일단 한국과 영국 모두 1년 만근했다는 가정 하에 비교해보면, 사실상 영국직장생활에 대한 환상을 가질정도로 화려한 복지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Chat-GPT가 계산해준 바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공휴일은 총 16일이다.
1월 1일 - 신정 (New Year's Day)
음력 1월 1일 - 설날 (Korean Lunar New Year's Day)
음력 1월 2일 - 설날 연휴 (Korean Lunar New Year's Day Holiday)
음력 1월 3일 - 설날 연휴 (Korean Lunar New Year's Day Holiday)
3월 1일 - 삼일절 (Independence Movement Day)
5월 5일 - 어린이날 (Children's Day)
6월 6일 - 현충일 (Memorial Day)
8월 15일 - 광복절 (National Liberation Day of Korea)
추석 달력 기준 8월 14일 - 추석 (Korean Thanksgiving Day)
추석 달력 기준 8월 15일 - 추석 연휴 (Korean Thanksgiving Day Holiday)
추석 달력 기준 8월 16일 - 추석 연휴 (Korean Thanksgiving Day Holiday)
10월 3일 - 개천절 (National Foundation Day)
음력 10월 1일 - 한글날 (Korean Alphabet Day)
12월 25일 - 성탄절 (Christmas Day)
그리고 여기에 연도별로 발생할 수있는 대체공휴일까지 더해지면, 휴가로 사용가능한 일수를 제외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최소 16+N일의 휴무일이 발생한다.
한국은 연차 발생 규정이 근로기간에 따라 다른데, 어쨌든 법적으로 근속연수가 1년 되는 사람을 기준으로 친다면, 1년 동안 80%의 근무량을 채웠을 경우 최대 15일의 개인 휴가일을 부여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1년을 꾸준히 다녔을 경우 최대 31일의 휴무가 가능하다.
영국의 경우, (여왕의 장례식, 대관식 등 어쩌다 발생할 수 있는 왕실 행사제외) 1년에 발생하는 공휴일 수를 계산해보면 최대 9일이다(2023년 기준). 그리고 중소기업의 경우, 1년을 쭉 성실히 일했다고 가정했을 때 9+25, 즉 34일 정도의 휴가일수가 제공된다. (한국도 1년 만근 전에는 1개월 만근시 1일 유급휴가가 주어지듯이, 나 또한 지금 회사에서 1년이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에 25일보다 훨씬 적은 유급휴가 일수를 제공받아 쓰고 있다.)
b. 중소기업 중에는 포괄임금제가 상당히 많다.
아마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취업하고자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래도 영미권이 한국보다 근무환경이나 급여조건이 낫지 않겠느냐'라는 막연한 환상을 갖기 쉬운데, 스타트업의 규모에 관계없이 (크든 작든) 지금까지 내가 본 회사는 모두 포괄임금제였다.
포괄 임금제란, 당신이 아무리 야근이나 철야를 하더라도, 그게 업무상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이었다면 추가수당 계산 없이 그냥 계약된 연봉으로 퉁치는, 말 그대로 '포괄'하는 것을 말한다.
c. 야근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아마 제일 누리고 싶은 것 한가지가 바로 이점이 아닐까 싶다. 야근이 없이 그냥 퇴근할 수 있다는 것. 물론 나도 이전 회사에서 야근을 종용하는 문화는 아니었기에 너무 과중하다 싶으면 때론 약간씩 딜을 해가면서 조정하기도 하며 비교적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늘 퇴근시간 이후로도 남아있는 사람은 존재했다.
이건 어떻게 보면 각자가 자기 시간을 매니징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조금 늦게 출근했거나, 중요한 최종마감까지 무언갈 끝내기 어렵다면 더 남아서 해결하든 아니든 알아서 시간분배를 해야 하는 그런 애티튜드가 좀 필요하다. 무슨 일이건 '퇴근시간이니까 일하지 마세요'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건 회사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야근 없는 삶에 대한 로망이 크다면, 해외취업을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을 수 있다. 오히려, 스스로 부족한 점 때문에 퇴근 후에도 +α로 혼자 무언가를 해야 할 수도 있다.(물론 그건 개인 선택이고, 회사에서 강요하진 않는다. 그냥 혼자 쫄릴 뿐이다.)
d. 도라이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한국을 벗어나면 도라이가 없는 유토피아가 펼쳐질 거라고 기대하는건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다.
내가 이전회사에서 퇴사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그 '도라이' PM 때문이었다. 독재자 식 업무 리딩은 기본이고, UX나 UI에 대한 중요성, 기본지식은 1도 탑재되지 않은 채 디자이너인 나만 달달 볶아 어떻게든 뽑아먹으려는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에, 들어간지 2개월 만에 3개월동안 고민해서, 결과적으로 몇개월만에 내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도라이는 어딜가나 있을거라는 말은 사람마다 '도라이'를 정의하는 기준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유효한 말이 될 수도 있겠다. 각자 그럭저럭 참을만한 기준치가 다 다르고, 특히나 영국은 정말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기에, 자칫하면 도라이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새롭게 정립하게 되는 계기밖에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감히 도전조차 해보지 못할 거라곤 보지 않지만, 한국땅을 떠나 영미권으로 간다고 해서 도라이가 없는 팀이 대다수일거라는 기대감은 아예 버리는 게 좋다.
e. 익숙함과 권태로움은 어디서 사는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건 약간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다. 나의 경우, 영국에 오면서 타 유럽국가 여행에 대한 기대감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망으로 왔는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거의 하루살이 수준으로 그날그날을 버텨오기 바빴고, 그렇게 며칠이 몇주, 몇달이 되고 나면 학생비자로 왔든 뭘로 왔든 꽤 많은 시간이 그냥 회사-집 루틴으로 거의 99%가 점철되어 버린다. 주말에는 주중에 혼을 쏙 빼놨던 바쁜 일상 때문에 더 집순이가 되도록 만들고, 이러한 패턴은 한국에서 주말만큼은 집콕하며 쉬던 패턴과 다를바가 없어질 수 있다.
한국에서의 삶이 권태롭게 느껴졌던 것처럼, 외국에서 살아도 맨날 하던 것들은 점점 무뎌져 갈 수 있다.
아마, 해외취업을 꿈꾸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매일매일이 여행같은 삶을 꿈꿀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국의 삶도 그냥 한국의 삶과 다르지 않다. 다만 영어가 지배적이며, 한국에 비해 이국적 외모를 가진 사람이 더 많고, 참 하루하루 예측하기 힘들다는 점을 빼면.
물론 휴일에 모처럼 시간을 내 런던 시내를 크게 걸어다니며 구경한다던지, 테이트 모던 갤러리나, 뮤지컬 등을 보러 나갈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갤러리도 매일같이 새로운 전시를 내거는게 아닌데 이미 다 본 것에 두근거리며 매주 보러갈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다.
f. 회식과 모임이 더 많다.
이건 사바사다. 그치만 영/유럽권 스타트업의 경우, 보면 뭐 그렇게 소소한 점심모임, 해커톤, 워크숍 등 이벤트가 한국회사들보다 잦다. 물론 모든 회사직원하고 내가 다 잘 지내는 관계라면 문제될게 없는데, 그 중 한두명과 만이라도 삐걱대기 시작하면 진짜 하기 싫어진다. 물론 빠진다고 나무라진 않지만, 그런 소셜라이징 활동을 하지 않으면 또 은근 대화에 잘 못끼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수도 있어 좀 힘들다.
보통 해외취업을 꿈꿀때, 거주경험이 없는 경우는 대개 '좋은 것'만 생각하고 오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수십년을 살아온 터전을 떠나서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불안한 만큼이나) 정말 가슴설레는 일이기에, 자칫하면 정말 UK-드림만 가지고 오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잘 알겠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물론, 좋은 것도 있다.
하지만 대개 한국사회는 욕심이 많다. 어느 하나만 특출나서는 안되고, 오히려 모든 것이 웬만큼, 고루 잘 조화를 이루면서 일정 수준이어야 만족하는 그런 성향이 짙은데, 한국에서의 그런 윤택한 그런 삶은 오히려 기대를 하지 않고 오는 것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려 할 때 멘탈유지에 더욱 도움이 될지 모른다. 모든 것은 늘 양면이 있다. 그리고 그 양면 중 단점은 당신이 원하는 수준의 단점만 존재해주지는 않는다.
사실 나도 그 사람중 한명이었기에 이곳에 와서 어느정도 마음을 붙일 때까지 실망한 점들도 꽤 있었는데, 모쪼록 이 글이 환상을 조금은 깨고, 해외취업이라는 것이 가진 양면성에 대해 조금 더 고찰해보고 나에게는 정말 무엇이 더 적합한 선택인가를 가늠해보는 참고지표로 활용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