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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e Sep 12. 2024

빛이 허락되는 곳

7. 그런 노트

그만하자는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헤어진다는 그런 인식조차 고갈되면  스스로 마무리될 일이었다. 그래서 혜린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마침내 더 이상 어떠한 이유로도 그를 찾지 않게 되는 때를.


현우는 늘 그만의 무심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보통의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피곤한 감정적 동요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다.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자각하기 전에 그는 일에 몰두하거나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거나 러닝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것으로 그저 대수롭지 않게 혜린의 그만 보자는 말을 대체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글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무언가 있었는데 없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없던 것을 있었다고 믿었다는 것일까. 혜린은 그와의 시간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되뇌고 있다. 주기적으로 그와 만나 밥 먹고 사랑을 나누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산책을 했다. 이런 구체적인 활동을 떠올린다고 그와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그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 아니라,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그런 것. 옷이 낡는 것, 화장실 타일에 곰팡이가 끼는 것, 문이 삐걱대며 녹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 어떤 노력이 더해졌다면 이 이별을 지연시키거나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했을까? 아니, 혜린은 그 어떠한 노력으로도 이 부질없는 허무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다.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그와의 관계는 다 쓴 노트가 아니라 커버만 있고 안의 종이는 없는, 그런 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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