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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디YUDI Nov 09. 2019

예상치 못한 내 가족의 죽음이란

병원으로부터 가족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다는 것


#1.


  내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2012년의 겨울이었다. 우리 집에는 오래된 유물인 집전화가 한 대 있었고 이는 엄마방의 침대 밑에 있었는데, 내가 방바닥을 이유 없이 뒹굴고 있던 사이에 전화가 왔다. 몇년간 울린적 없던 전화인지라 나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 남해 이모부였다. 이모가 출근길에 자동차 사고가 나서 사고사 당하셨다고.

  우리 이모는 5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고, 건강 상의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외가는 모두 장수하셨고, 아빠는 엄마를 떠났기 때문에 엄마는 당연히 은퇴하면 고향인 남해로 돌아가서 이모랑 오손도손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그들은 배다른 자매였으나 자매의 정이 깊었고, 엄마한테 사투리로 모진 소리를 뱉으면서도 같이 울어주던 이모가 나는 참 좋았다. 암투병으로 고생하시던 외할아버지 수발을 고생하며 다 해낸 것도 큰 이모였다. 이모는 아들 결혼식에 보탤 생각으로 추가 근무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어이없이 돌아가셨다.

  나는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숨을 쉬지도 못했다. 이모와 내가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따뜻한 이모였고 이렇게 가버리기엔 너무 마음씨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내 가족이 아닌가... 내 엄마의 언니고, 내 할아버지의 딸이고, 그리고 나의 이모인데..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실신을 해가며 3일을 내내 울었다. 오랜 항암 투병 끝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되려 호상이라며 싱글벙글하던 엄마였는데... 나와 동생은 조용히 구석에서 가슴을 치며 꺼이꺼이 울었다. 한창나이에 비명횡사한 가족의 죽음은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 일이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2.


  신문지상을 오르 내리는 일이기에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그 환자는 13층 높이의 외벽에서 케이블 작업을 하다가 떨어져서 사망했다. 그는 거의 맨몸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한눈에 봐도 젊고, 건강한 30대 남자였다. Trauma level 1은 손이 너무 많이 가서, 여럿이 달라붙어야 하기에 나도 예진 구역을 보다가 느릿느릿 소생실에 들어가 봤다. 물론 내가 도울 일은 그다지 없었지만, 뭐라도 할까 싶어서 갔다가 보호자들에게 연락을 하는 의사를 보게 되었다. 병원에서 그런 전화를 받았을, 깐깐한 시골 양반인 이모부가 떠올랐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환자는 결국 사망했다.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헬맷으로 머리를 보호하고 있다 하더라도 다발성 골절로 내부 장기 손상이 올 수밖에 없다. 기록을 열어본 것은 아니었으니, 그냥 추측이었으나 CPR시간이 짧았던 걸 보면 이미 우리가 더 해줄 것이 없었다는 거다. 그의 가족이 도착하는 데는 얼마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던 것 같다.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통곡소리로 응급실이 가득 찼다. 평소 같으면 간호사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환자들의 불평불만도 그날따라 쏙 들어갔다. 사람들은 느낌으로 알았다. 예견된 죽음이 아니었을 거라는 것을. 환자의 보호자 중 한 명으로 보이는 어떤 사람은 울다가 실신했고, 어떤 사람은 주저앉아서 가슴을 쳤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구석에서 잠을 잤다. 나는 죽음을 연민하거나 동정하진 않으나, 덜컥 갑작스럽게 비명횡사한 우리 이모가 생각나서 마음이 좋진 않았다. 애석했다. 통곡하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떠나간 젊은 가장의 죽음. 사회면 기사의 짧은 한줄의 제목으로 마감한 그의 삶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3.


  환자를 장례식장으로 보내고 모든 통곡소리가 사라지자 응급실은 다시 이전과 같아졌다. 침묵하던 환자들은 다시 불평하기 시작했고, 갑작스럽고 애석한 누군가의 죽음은 온데간데 없어진 일처럼 취급되었다. 죽음은 가깝지만 생경하고, 살아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근래에는 하루에 한 두 명씩은 사망환자가 생겨나고, 대체로 내 듀티 중에 한 두 명이 사망한다. 그 죽음들이, 가족들의 곡소리와 슬픔이 나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데, 대기실에 남은 환자들은 그게 모두 없는 일인 것인냥 행동했다. “이제 저 사람들 가고 났으니, 내 일 좀 해주시오”라며.

  최근에는 내가 1년 전에 담당간호사로 만났던 환자를 1년 뒤에 사망 직전의 상태로 만나게되어 사후수습까지 내가 하게 된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 사자와 나의 시간이 갑자기 단절되는 느낌을 갖는다. 중증구역에서는 대게 4-5명의 환자를 전담하기 때문에 환자와 내가 만나는 시간은 꽤 긴 편이다. 그러니, 환자의 사망 후에는 그 환자와 내가 나누었던 짧은 대화들, 내가 그 환자 몸에 해주었던 여러가지 처치들이 손 끝에, 귓가에 아련하게 남을 수 밖에. 이런 죽음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익숙해질 수 없는데, 나는 일로써 그 환자의 죽음을 처리하고 또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한다. 보호자들의 애도가 끝나기를 적당히 기다렸다가 사후처치를 하고, 몸에 붙은 관들과 주사를 전부 제거하고, 거즈로 입을 물려드리고, 환자복도 새것으로 갈아입힌 뒤 이불까지 끌어올려 덮어드린다. 누구도 나에게 괜찮은지 물어보진 않는다. 응급실 간호사가 이런 일까지 해야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익숙하지 않았던 내 이모의 죽음과, 먼 타국에서 맞았던 사랑하는 나의 할머니의 죽음, 14년을 가족으로 살았던 백이의 죽음이 동시에 떠오르고, 가슴이 미어진다. 누군가의 죽음은, 나의 것이기도 했기에 단순히 일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나의 직업의 비극일까.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환자분들의 명복을. 가족과 단절을 겪는 모든 가족들에게 위로를. 그를 담당했던 의료진들에게 작은 공감의 마음을.


  그리고, 응급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내 환자분들의 존엄을 내가 조금은 지켜드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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