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자의 이천(≒이촌)일기
오랜만에 육아일기를 쓴다. 이 글 직전에 쓴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다시 읽어봤는데... 당시의 나는 얼마나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있었던가. 육아일기가 아니라 분노 표출에 가까웠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혼났다. 지울까말까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두고두고 반성의 거울로 삼기 위해 지우지 않기로 했다.
나를 그렇게도 힘들게 했던 집 문제는 결국 집을 30번 보여주고나서야 해결되었다. (30명이 아니라 무려 30번!!!) 그것도 집주인이 시세에 맞춰 가격을 내리고서야 겨우 나갔다. 대망의 이삿날에도 집주인은 약속한 잔금 처리 시간에 2시간이나 늦었고,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실로 놀라운 면모를 보였다. 나와 남편은 드디어 이 말도 안 되는 집주인을 벗어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정말 기쁘다!!!) 그렇게 겨우겨우 이사를 한지 이제 한 달. 제목 그대로다. 유치원 다닐 때쯤 잠시 의정부에 살았던 걸 제외하고 서울, 그것도 노원구 상계동에서만 20년을 넘게 살아온 나는 이천 시민이 되었다.
미리 얘기하자면, 내가 이천을 무시하거나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서울에서만 줄곧 살았고(의정부에서 살았던 시절은 기억이 잘 안 난다), 이사 직전엔 노원에서도 가장 번화하고 밤에도 불이 꺼지는 법이 없던 노원역 역세권에서 살았던 내게 이곳은 많이 낯설었다.
남편을 위해 이사를 결정한 뒤, '그래도 경기도잖아'라는 생각이 나를 위로했다. 남편과 단둘이 있는 신혼 때였다면 이사가 조금도 겁나지 않았을 텐데, 돌쟁이 아가랑 같이 간다고 생각하니 이것저것 겁이 났다.
일단 노원에는 친한 사람도 많고, 특히 개월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단풍이 친구들이 많지만 이천은 남편 말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제일 힘들었다. 거기다 노원 집은 소아과까지 걸어서 2분, 백화점과 지하철역은 걸어서 5분, 심지어 스타벅스와 서브웨이는 걸어서 1분 30초였다. 혼자 단풍이를 보다가 지루해질 때쯤 전혀 부담없이 산책에 나설 수 있었고, 단풍이가 갑자기 아파도 소아과에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웬만한 음식들은 다 배달이 가능했고(심지어 통삼겹 도시락에 쌀국수까지!!), 맥도날드와 롯데리아는 물론 KFC와 버거킹까지 배달이 됐다. 정말 환상적인 곳이었다.
그런데 이천에서 첫 집을 보자마자 나는 컬쳐쇼크를 받았다. 집 베란다에 드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서울에서 볼 수 없던 비주얼이었다. 부동산 사장님께 물었다.
"이천 시내는 좀 나은가요?"
"원래 이천은 아파트 대부분이 다 집에서 논밭이 보여요."
그래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천 시내에 있는 집을 꼭 보고 싶다고 했고, 부동산 사장님 말대로 그 집에서 또 논밭과 마주했다. 절망에 빠진 내게 남편은, 그래도 회사 선배가 동네 지나다니다가 논밭에서 키우고 있는 과일이나 쌀을 바로 사먹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며 긍정 마인드를 선사했다.
소아과까지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근데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이천에 정말 믿을 만한 병원이 없어요' '애들 병원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야 하나 고민될 정도에요'라는 말들이 눈에 띄었다. 심지어 남편의 회사 선배로부터는 "응급이다 싶으면 그냥 고속도로 타고 서울아산병원까지 가. 이천엔 소아 응급해주는 곳이 딱히 없어."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엄마에게 아이의 병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딱 맞는 약을 주는 소아과는 정말 중요하다. 카페나 빵집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제대로 된 소아과 없이 산다는 건 매우 불안한 일이다. 그리고 아직 면허가 없다 보니, 혹시나 생길 수 있는 단풍이의 응급 상황 때 무조건 남편에게 반차를 쓰고 얼른 회사를 뛰쳐나오라고 해야 한다는 게 영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면허를 따도 고속도로를 잘 탈 수 있을까? 그것도 아픈 애를 카시트에 태우고 나 혼자...?(또르르)
하나 더. 이천 시내에 살고 있는 친구가 있어 물어보았다.
"이천에 백화점은 있어?"
"NC백화점이라고 있긴 한데... 서울에 있는 그런 백화점은 아님 ㅎㅎㅎ"
"그럼 너 옷은 어디서 사?"
친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인터넷"이라고 답했다. 한 달 지내면서 알게 된 사람들에게 이 얘길 했더니 모두가 고개를 끄덕끄덕... "저는 그래도 수원 정도일 줄 알았어요."라고 했더니 다들 "수원이요? 거기랑은 비교가 안 되죠. 사실 이천이 수도권 치고는 발전이 덜 되긴 했어요."하며 입을 모았다.
결정적으로... MBC 파워 FM을 즐겨듣는 나는 아무리 서울경기권 주파수로 맞춰도 라디오가 들리지 않고, 심지어 충북 주파수로 맞춰도 잘 들리지 않아서 내 생애 처음으로 MBC에 문의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라디오 송신소 직원분은 내가 있는 지역을 자세히 묻더니, "아 거기가 원래 음영지역이긴 한데... 원주 송신소가 가까우니까 그쪽으로 잡아보세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원주 주파수로 맞췄음에도 실패... 음영지역이란 단어도 처음 들어본 나는 집 근처 소아과에 걸어가다가 정말 가까이에 이천 톨게이트가 보이는 걸 보고 MBC mini앱으로 라디오를 청취하기로 했다.
그래도 경기도인데...가 아니었다. 여긴 아무래도 내가 알던 '수도권'이 아닌 것 같다. 내게 이천은 정말 '이촌'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우리나라의 지역 발전 불균형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실감했다.
그래서 사실 이사하기 전까지 걱정을 많이 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날씨도 추워서 아기 데리고 어디 나가기도 힘들어서 당분간 강제 집콕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이러다 우울증이 심하게 찾아오면 어떡하지? 노원이 그렇게 좋아도 육아우울증이 자주 왔는데...'
자. 이사한 지 한 달이 된 지금, 어떻게 됐을 것 같은가.
너무너무너무 좋다!!!!
놀라운 건, 한 달을 거의 강제 집콕에 대화 상대가 한동안 남편과 단풍이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노원에서 살고 있을 때보다 덜 우울하다는 것이다.
일단 생활하는 데는 정말 너무너무너무 불편하다. 아직 밖에선 한 발자국도 걷지 않고 석상처럼 서있는 11키로의 단풍이를 힙시트에 매달고 걸어다니기가 너무 힘들어서 외출은 자체 포기 상태다. 유모차도 길이 매끄럽지 않다보니 한번 나갔다 오면 팔이 아프다. 소아과는 단풍이를 안고 걸어가기에는 너무 힘들어서 버스를 이용하는데 배차 간격이 엄청나다. 나는 아직도 이곳 버스들의 기본 배차 간격이 20-30분이라는 걸 편안하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이마트는 남편이 있을 때만 갈 수 있다.(이천에서 살려면 정말 면허가 필수!!) 다행히 이천에 단 하나뿐인 이마트가 쓱배송을 해준다. 근데 제로콜라가 품절이 되어서 죄송하다는 연락을 받고 당황했다. 보통 콜라는 품절될 만한 품목이 아니지 않나......
그리고 내사랑 쿠팡 로켓배송이 다음날 도착이 안 된다. 4일 후에 도착한다고 뜬 적도 있다(이게 무슨 로켓배송임..). 덕분에 정말 필요한 것만 사게 되어 자동 절약이 되고 있다. 또 내사랑 맥도날드가 배달이 안 된다... 일단 웬만한 음식들 배달이 안 된다. 덕분에 요즘 대세라는 '냉파'가 절로 된다.
이삿짐 정리를 혼자 하기가 버거워서 서울에 살 때 썼던 가사도우미 어플을 켜서 서비스 신청을 했더니 서비스 지역이 아니란다. 요즘 유행하는 세탁물 수거 세탁 어플도 전부 다운받았는데 모두 서비스 지역이 아니라며 거절. 이삿날에는 중국집을 시켜먹겠다고 평소 사용하는 배달 어플을 켰는데 이 지역은 서비스 준비중이라고... (다행히 지금은 서비스가 된다)
이래저래 불편한 게 산더미이지만 그래도 남편의 귀가가 빨라지면서 육아가 좀 덜 힘들어졌다. 아무리 칼퇴를 해도 8시를 넘겨야 집에 도착했던 남편은 이제 아무리 늦어도 6시면 집에 도착한다. 야근해도 9시나 10시다. 일단 출근을 평소보다 2시간 늦게 하니까 9시나 10시에 들어와도 힘든 게 덜하다. 남편도 체력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퇴근 후에 단풍이와 잘 놀아준다. 그리고 단풍이를 같이 재운 후에 둘이 대화도 더 많이 나누게 되었다. 그래서 다툼이 좀 줄어들었다.
집도 한몫했다. 이사 날짜 맞는 집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생각지 않았던 큰 평수의 집으로 오게 되었는데, 아주 쾌적하다. 이래서 역시 넓은 집이 좋구나 실감했다. (단풍이가 어지르는 영역도 같이 넓어진 건 슬픔...) 또 노원에서 살던 집이 남향인데도 앞동과 옆동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나머지 매일 1시간 정도만 햇빛이 들어오고 쭉 어두웠는데, 여기 와보니 그것 때문에 우울증이 더 자주 왔었나 싶다. 아파트만 덜렁 있고 주변이 다 논밭이라 그런지 햇빛이 잘 들어오는데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아침에 기분이 좋다.
그리고 내게 충격을 줬던 논밭 비주얼은 이제 힐링이 되고 있다. 집에서 논밭이 보이는 게 생각보다 너무 좋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유모차를 끌고 나가 논밭쪽 길을 걸었는데 너무 상쾌했다. (물론 가다가 길에 닭을 그냥 풀어놓은 걸 보고 화들짝 놀라긴 했다.) 문제는... 맑은 공기를 즐기며 너무도 잘 걷고 있었는데, 도시 아기 단풍이는 가게도 없고 사람도 없는 휑한 길이 무서웠던지 엄청 목놓아 울어대더니 결국 토까지 해서 10분도 못 걷고 집에 복귀했다.
사람들은 이제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일단 남편 회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대체로 이천은 서울보다 사람들이 더 친절하고 말도 잘 걸어주는 것 같다. 유모차에 토한 단풍이를 한손으로 안고 다른 손으로 유모차를 밀고 가는데 집까지 오르막도 있어서 만만치 않았다. 그걸 보고 뒤에서 오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유모차를 집까지 대신 밀어주시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아주셨다. 엉엉. 지금 다시 생각해도 너무 감사하다.
이마트가 하나지만, 주말에 가도 서울처럼 붐비지 않아서 참 좋다. 이마트에 맥도날드가 있어서 장볼 때마다 맥도날드를 먹을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리고 여주 프리미엄 아울렛과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이 집에서 20분밖에 안 걸린다. 평일에 여주 프리미엄 아울렛을 갔는데, 푸드코트에 가서야 아울렛에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은 아직 안 가봤는데, 여기도 평일에 남편이 칼퇴한 시간에 가도 된다고 생각하니 뜻하지 않게 누리는 호사다.
용인 에버랜드도 가깝고, 영동고속도로가 있다보니 강원도 가기도 편해서 아이들이랑 놀러다니기엔 이천이 좋다는 말도 이곳에 와서 정말 많이 들었다. 남편도 나도, '이불 밖은 위험해' 스타일이지만, 날 따뜻해지고 단풍이가 밖에서 걷기 시작하면 좀 여행을 즐기는 쪽으로 라이프스타일을 바꿔볼 계획이다.
이번 이사가 단풍이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아빠를 매일 만나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평일에 3일은 아빠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아빠를 무척 좋아하는 단풍이는 자다가도 일어나 밤 11시에도 야근하고 온 아빠랑 놀다가 잤고, 새벽 6시에 알람처럼 일어나 출근하는 아빠와 인사한 뒤 잠들었다. 남편도 고생이지만, 얼마나 아빠가 좋으면 그 어린 아기가 잠을 포기하나 싶어 짠했다.
그런데 이제는 단비가 아침에 눈만 뜨면 아빠가 있다. 비교적 일찍 자는 편이라 야근하고 온 아빠를 못 만나지만 그래도 다음날 아침에 아빠를 만날 수 있다. 심지어 조금 놀아주다가 나가기도 하니 단풍이는 신났다. 잘 때 좀 예민한 편인 남편은 단풍이가 너무 자주 깨다보니 평일엔 거실에서 자는데, 단풍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거실로 직행해 아빠에게 놀아달라고 한다. (엄마를 깨우지 않다니 정말 효녀다!!)
같이 저녁을 먹고 재우는 것도 좋다. 보통 단풍이는 자기 침대에서 자지만, 엄마 아빠 사이에서 같이 자는 걸 가장 좋아한다. 일단 재우는 데 에너지 소모가 반으로 줄어들어 엄마는 행복하다. 엄마아빠 둘다 있어야 자려는 단풍이 덕에 30분 정도는 셋이 한 침대에서 뒹굴뒹굴한다. 남편도 좋아라한다. (물론 피곤해하긴 한다. 심지어 재우다가 먼저 잠든 적도 있음)
회사가 가깝다보니까 남편 야근날에 단풍이를 데리고 나가 근처 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먹은 적도 있다. 심지어 야근날이어도 아빠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한창 <아빠의 전쟁> 다큐를 보며 남편과 함께 꿈꿨던 저녁 시간을 이천에 와서 누릴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쁘다. 무엇보다 단비가 아빠와 애착이 잘 형성된 것이 느껴지고, 남편도 단비와 사이가 더 좋아진 것이 느껴진다. 딸은 아빠의 지지와 호응이 건강한 자존감을 길러주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데, 그 점에서 이런 변화가 참 기쁘고 반갑다.
오랜만에 일기를 쓰기도 하고 아직까지 이곳에 대화 상대가 많지 않아서 말이 많았다. 정말 긴 글이다. 그리고 사실상 육아일기보다는 근황 토크에 가깝다. 하하하하.
내게 안부를 물으면서 난중일기를 잘보고 있다고 하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크다. 부끄럽기만한 글을 잘봐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빨리 다음 편을 써야 한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사실 그동안 썼다 지우거나 쓰다가 중단한 일기들이 많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끝맺지 못한 글들이다. 사실 글은 우울할 때도 잘 써지지만, 내 안에서 어느 정도 소란이 잦아들고 정돈된 다음에 나오는 글이 있다. 이번 일기는 정말 그런 글이다.
그동안의 난중일기가 우울함을 떨치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쓰는 글이었다면, 이 일기는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진 상태에서 쓴 글이다. 이천으로 이사한 뒤 몸과 마음이 한결 편한 시간을 보내는 만큼, 2017년의 난중일기는 더 좋은 내용들로 가득 채워보겠다는 각오를 다져본다.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