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음을 저항하는 태도
서재 방의 벽면에 뒤라스 사진을 붙였다. 책을 샀더니 표지를 엽서로 보내준 것이다. 한 손에는 몽당연필만큼 짤막해진 담배를, 다른 한 손엔 빼곡한 글이 담긴 원고를 쥐고 있다. 원고를 쥐고 있는 손에 있는 반지는 디자인이 대담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온화해 보인다. 그 뒤로 타자기가 놓여있다. 전형적인 작가 사진이다. 몇 살 즈음의 사진일까, 어떤 작품을 쓸 때의 사진일까, 사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면 새로운 나이를 갖게 되겠지만 사실 나이에 관심이 없은 지 오래다. 몇 년째 만 나이의 폐해만 얘기할 뿐이다. 물론 나이가 드는 건 싫다. 정말 싫다고 썼다가 스스로를 위해 정말을 지웠다. 내가 몇 살인지가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증명해 주거나 의미하거나 보장해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담배를 살 수 있는 나이가 지난 지 오래고,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지 오래다. 둘 다 아쉽게도 내게 별로 각별한 권한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부터 나이가 없는 것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없는 것처럼.
우연히 꺼내 읽은 수전 손택의 책에서 바르트를 추억하며 쓴 글의 한 구절이었다.
'그는 나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움직임은 둔하고 옷차림은 꼭 교수 같았지만 늙어 보이지는 않았다. 휴식하는 법을 아는 육체였다.'
올해의 신년 다짐엔 이 말을 넣어보기로 한다.
이제 '나이가 없는 것처럼 살고 싶다고.
물론 20대 초반,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펼쳐 읽으며 어떤 종류의 지적 환희에 도취되어 '언젠가는 나도 롤랑 바르트 같은 첨예한 글을 쓸 수 있을까?'라고 기대하고 염원하던 그 나이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척 다르긴 하다. 이제 나는 롤랑 바르트처럼 쓸 수 없다는 체념으로, 그의 책을 뒤적이며 내 원고에 인용할 문구를 찾아본다. 이 예민성 천재 같으니라고 쯧쯧 하며. 그러고 보면 귀여운 허영이야말로 삶의 생기를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요소다. 체념하지 말고 허영으로 무언가를 야망 하는 일이 '불쌍해'보이지 않고 '귀엽게' 보일 수 있다면 말이다.
신년을 앞두고, 매년 혼자만의 일기장에 써 놓았던 신년 기록을 읽어본다. 어떤 해는 두 주먹 불끈하며 귀여운 야심에 차 있기도 하고, 어느 해는 그저 지금이라는 현재성에 충만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어떤 해에는 초현실주의자 선언을 읽으며 새해를 시작하고, 어떤 해는 폰 게임을 자주 하는 자신에게 질려하며 게임을 지우는 것으로 시작하기도 하고, 바르다의 영화를 보기도 하고, 평온과 평화를 생각하기도 한다. 거창한 마음과 소박한 마음이 쿵쿵 흔들리며 나는 자라났고 자라왔다. 거창함과 소박함의 순서를 이리저리 뒤섞어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서른한 살의 다짐과 서른세 살의 다짐은 다른 듯 같다. 결국은 건강한 야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잘 돌보며 살기.
물론 이제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 내가 나만 돌볼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돌볼 사람이 생겼고, 키워야 할 사람이 생겼고, 사랑하는 사람이 늘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사랑인 존재를 만났다. 나의 신년 다짐엔 꽤 많은 용량의 책임감과 모성애가 동반되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나의 방향성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이십 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쭈욱. 내가 가고 싶었던 그 방향성을 향해 가면 된다. 모자람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나음과 바름을 고민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과, 내가 나눌 수 있는 작은 책임과 무엇보다 건강한 야심을 실현하면서. 나이는 상관이 없다.
신년은 야심의 시기다. 연말이 되면 나도 모르게 감사함이 몽글몽글 피어나고, 따뜻함이 이곳저곳에서 풍겨난다면 신년은 내 안에 있었던 야망이 출렁거리고, 복국처럼 맑은 야심이 경건하게 우러나온다. 스스로에게 야심이 존재함을 느끼는 일은 나로서는 다소 낯선 일인데, 이때는 그렇다.
언제나 같아 보이는 신년의 고민에 새로운 목록이 등장했다. 삼십 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했던 고민은 낡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노화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고와 시야의 낡음에 대한 두려움. 자신만의 세상에 갇히거나, 반복적인 일상에 갇히거나, 작은 테두리에 갇혀 서서히 낡아가는 두려움. 더 이상 모험이나 방황을 하지 못하는, 신기함과 총명함보다 안전함과 안락함을 원하는 - 혹은 그래야만 하는 - 생활이 지속되다 보면 내가 가진 어휘와 문장들이 낡아지면 어쩌나 고민했다. 아니 그보다도, 내 사고와 시야가 편협해지고 고리타분해지면 어쩌나 고민한다.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낡고 지루해지는 것에 대한 고민이다. 낡기 싫다며 갑자기 먼 유럽으로 훌쩍 떠날 수도, 벨리댄스를 등록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낡음에 대한 해결책이 절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여전히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은 얻지 못했지만, 반복적인 일상이 낡음의 원인은 아니며, 나이가 많아지는 것도 낡음의 원인은 아니라는 용기는 얻었다. 해답이 아닌 과정으로서, 낡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은 계속해서 궁금해하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환기를 시켜주는 일. 감각에도, 지성에도(내게 그것이 있다면?), 그리고 일상과 관계에도 먼지가 쌓이지 않고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때 되면 수시로 문을 열어주고, 빗질해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고 싶을 뿐.
경험이 쌓이는 일이 경력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힘이라고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권력’의 힘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더 겁 없이 해볼 수 있다는 나만의 배짱으로만 작용하길 바란다. 시간이 다 차면 흔들어 다시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는 모래시계처럼 수시로 흔들면서, 쌓여있지 않고 흐르는 그 모습에 수시로 감화받으며 살고 싶다.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 모래시계처럼, 나이가 없는 것처럼 사는 롤랑바르트처럼.
올해부터 신년 목표로 오랫동안 이 문구가 추가될 것이다. ‘나이가 없는 것처럼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