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은 시트콤처럼, 인생은 고레에다 영화처럼
시트콤 프렌즈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시즌 10화의 마지막 회에서 커리어 대신 사랑을 택한 레이첼이지만, 그보다 더 뭉클한 순간을 새시대의 인터페이스가 가능하게 해 준다. 마지막 회를 다 보자마자 넷플릭스가 권해주는 ‘시즌 1화의 1을 다시 보시겠습니까?’라는 물음에 ‘네’라고 대답한 뒤 10년 전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지금은 넷플릭스에서 프렌즈가 빠졌지만)
10년 전 시즌1의 1화로 돌아가면, 오로지 돈 때문에 선택한 치과의사 베리와의 결혼식을 박차고 도망쳐 나온 레이첼을 볼 수 있다. 직업도, 사랑도 진정한 친구도 없는, 철부지 그녀를 다시 만난 순간, ‘스포일드 차일드’ 였던 레이첼의 10년 성장 서사가 휘리릭 내 머릿속을 지나간다. 돈만 보고 결심한 결혼식장을 뛰처나온 레이첼이, 사랑만 보고 비행기를 뛰처나오는 것으로 수미상관을 이룬다. 아,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20분짜리 시트콤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좋아한다. 프렌즈나, 브루클린 나인 나인, 빅뱅 띠어리처럼 인물들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들이 특히 그렇다. 친근한 풍경, 한정적인 배경, 사랑스러운 캐릭터들. 한 회 한 회는 소소한데, 한 시즌이 마무리될 때쯤엔 전혀 소소하지 않은 묵직한 마음가짐을 갖게 하는 것이 이중적 매력이다.
어떤 이야기는 갈등이 중심이 되고, 어떤 이야기는 판타지적 배경이 중심이 되다면, 시트콤의 중심은 언제나 캐릭터다. 히어로물에는 ‘슈퍼파워’가 있다면(그 히어로물의 본체는 대부분 약점 투성인 인간이지만), 시트콤 속 인물들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약점이 있다. 경쟁심이 지나치게 강하다던가, 덤벙거린다던가, 남보다 감수성이 풍부하다던가. 그 자체로는 약점이 아니며 심지어 그 자체의 매력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사람들과 어울릴 때 방해가 되기 시작하면 약점의 소재가 된다.
시트콤의 에피소드는 캐릭터의 약점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시즌 초기에는 어떤 맥락과 상황에서 이들이 자신의 취약한 모습을 더 성급하게 드러내는지 보여주며 시청자들에게 그들이 가진 약점을 학습시킨다. 시즌 중반에는 이들이 자신의 약점을 부인하다가 인정하는 순간들이 나온다. 유치함, 정리 강박, 섬세함 등이 자신의 약점임을 ‘싫지만’ 인정한다. 좋은 시리즈의 마무리는 그들이 스스로 인지한 약점을 자연스럽게 극복하고 '성장'함을 보여준다. 그 성장의 개연성이 작품성과 연결되고, 성장의 서사가 감동과 직결된다.
자신의 승리만을 추구하던 경쟁심이 강한 사람은, 조직을 위해 희생을 하는 법을 배운다. 타인의 의견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더 낼 줄 아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소극적이고 자신이 없던 사람은, 점차 자신의 가능성을 믿게 된다. 경제적 능력이 없어 아빠에게 카드를 받아 사용하던 레이첼은, 파리의 루이비통 본사에서 오퍼가 올 만큼 커리어적으로 성장했지만 사랑을 위해 친구와 가족이 있는 뉴욕을 선택한다. 사람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고수하던 쉘든은 에이미를 사랑하기에 그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자신의 성장이 친구들의 사랑 때문임을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성장의 중심에는 오로지 사랑이 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연인에 대한, 가족에 대한, 상사와 동료에 대한 사랑이. 개인에게 몰두해 있던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내가 속한 집단으로 돌려 어울림이 가능한 인간으로 성숙하게 한다. 아, 물론 이타가 성숙의 동의어라면 말이다.
직장생활의 에피소드와 시즌 역시 이렇게 흘러간다. 나의 약점이 드러날 때마다 새로운 에피소드가 생긴다. 덤벙거림, 부주의함, 예민함 등 다양한 약점이 있지만 유난히 도드라지는 나의 약점을 확인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결국은 극복해야 한다. 왜냐면 나는 자영업자가 아니라, 조직 안에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 조직원이기 때문이다. 내 덤벙거림으로 다른 사람이 십 분 더 일해야 한다면 그건 개성이 아니라 무개념이다. 나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클라이언트에게 할 말을 하지 못하면 내 일을 더 잘할 수 없게 하니, 비효율이다. 내가 예민해서, 타인의 말에 민감하게 상처받는다면, 내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으니 무뎌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내 강점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약점을 보완하는 과정이 커리어적 성장과 이어져 있다. 업무와 조직생활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내 심신을 지키는 데 걸림돌이 되는 스스로의 특징을 파악해, 융통성 있게 가꾸고 다듬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역시 놀랍게도 마치 시트콤처럼 사랑으로 가능하다. 일을 내 조직을, 내 동료를 사랑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니까. 내 약점을 방치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조직의 효율과 내 업무의 방향성을 저해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그 약점이 내가 존중하는 동료의 시간을 빼앗고,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켜 내 강점을 온전히 보이지 못하게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초점은 ‘제거’가 아닌 ‘다듬기’다. 조직의 자아는 내 개인의 자아와 다르기에, 조직에 맞춰 나의 어떤 면을 조절하는 것일 뿐, 내가 가진 원형질에 손을 대는 것은 아니다. 조직에서 내 약점을 다듬는 것은, 일하는 자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과정이다. 조직에선 이타가 성숙의 동의어지만 내 개인의 삶에서 조화와 희생이 과연 무작정 선일까?라고 생각하면 그건 아니다. 개인의 자아는 효율만을 추구하며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에서 ‘직장’을 빼고 조직의 구성원이 아닌 개인의 영역과 생활로 이야기하면 ‘약점’을 다루는 방식이 정말 달라진다. 난 내 삶의 약점들을 고치고 싶지 않다. 약점은 흠이 아니고 틈이라고 믿기 때문이고, 그것이 흠이 아니라 틈이라면 그 틈은 가능성이자 내게 숨겨진 시라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흠'을 마주하며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흠 투성이라 생각해왔다. 스스로 창피하고 또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흠들이 참 많이도 있었다. 부주의함이나 덤벙거림을 제외하고도 나를 답답하게 하고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그 부족함들이 정말 부끄러운 흠처럼 느껴지는 날도 많다. 내 안에서 군데군데 느껴지는 위선, 스스로도 멍청하다 느끼는 조악함, 채우지 않고 넘어간 모자람. 스스로의 흠을 모두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기엔 아직 내가 연약하다 판단하여, 강해질 언젠가를 기다렸지만 시간은 흠을 메워주지 못했다.
가까스로 외면하고 살지만 이따금 그것이 더 도드라지는 날, 나는 한없이 작아졌는데도 이 흠 만은 작아지지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흠을 아무렇지 않은 척 내보이는 날에도 나는 어떤 또 다른 흠은 숨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고심 끝에 눈을 질끈 감고 내 비밀을 털어놓는 날도, 나는 어딘가 정말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비밀을 이해받고 싶었으면서도 이해받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누군가가 그 흠을 긍정하는 날에도 결국은 내가 부정하고 있었기에 위로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를 편안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홈에 꽉 조여 편안하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그렇지만 편해지고 싶었다. 세상엔 나 외에도 불편한 일이 많으니, 나만은 나를 편하게 바라봐주고 싶었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 스스로의 흠을 고스란히 마주 보고자 했다. 부끄러웠던 것을 아주 오래오래 바라보면 사실은 그것이 아무것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될 때가 있는 것처럼, 내 안의 흠도 놀랍게도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메우거나 채우려는 대신, 그 흠을 얼룩이나 흉으로 보는 내 부정적 시선을 거두고 나니 치부나 단점으로서의 흉이 아닌 그저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몇 가지의 틈일 수도 있다는 화해가 시작됐다.
오랫동안 부끄러워하고, 감추려 했던 나의 흠이 어쩌면 내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귀엽다고 생각하는 틈이라고 생각하면 내 체온과 맥박이 교묘히 바뀌는 기분이다. 더 따스하고 그러면서도 더 촘촘한 맥박을 지닌 사람이 된다. 흠이 아닌 틈으로 빈 공간에는 신비감이, 완벽하지 않고 오히려 엉성해 사랑스러운 그 틈에는 꽤나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 틈으로 시적인 공간이 태어난다. 결핍과 모자람에서 나를 위한 시가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에게 읽힐 시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스스로를 조금 더 사랑스럽게 바라 봐줄 이유가 된다.
우리가 가진 틈 안에는 발명되지 않은 어떤 원형질의 감성이, 소낙비를 담아둘 만큼 깊은 우울의 우물이, 위선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반성의 시간이 담겨 있을 수 있다. 완벽하지 않음이라는 그 사랑스러움, 공허에서 느껴지는 고독의 결, 비어있음에서 느껴지는 조용한 희망, 나는 흠이라 생각했던 홈들을 틈으로 여기며 그 안에 담긴 시들을 읽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부족함과 어리석음에서 자유로워져, 그 여백의 신비함을 즐길 수 있고, 부끄러움이 아닌 호기심으로, 아직 감상되지 않은 수줍은 내 세계를 스스로 안아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삶이 불현듯 아름답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걷는 듯 천천히’라는 책의 이 구절을 정말 좋아한다.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결핍을 가능성으로 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과 그 결핍을 세계에 건네는 손길로 풍요롭게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그의 시각은 참 따뜻하다. 스스로의 약점을 흠이 아닌 틈으로 보고 싶다는 내 마음과 유사하다 믿고 싶지만 사실 훨씬 더 멋지다. 내 안에 고여있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 스스로의 결점을 인정하고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이기 때문이다. 진공의 삶이 아닌, 마찰과 소음 투성인 삶에서 우리가 느끼는 풍요가 인간다움이라는 아늑한 차원을 만든다.
그리고 약점을 대하는 이 두 가지 방식이 나를 더 입체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직장에선 내 일을 더 잘하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약점들을 보정하고 보완하며 살아가지만, 현실의 내 삶에선 내가 가진 흠들의 가능성을 음미하며 살아간다. 영원한 약점도, 영원한 강점도 없는 올록볼록 입체적인 삶은 옳고 그름이 없어 더 매력적이다. 직장에서의 약점은, 개인적으론 매력이 되고, 개인적으론 단점이라 생각한 점들이 직장에선 강점이 된다. 일에는 도움이 되지만 사는데 피곤한 강박적 성격처럼, 사는데 즐겁지만 일할 땐 고쳐야 할 느슨한 성격처럼.
시트콤처럼 우당탕탕 깨지고 반성하며 약점을 보완하다가도, 고레에다 영화처럼, 혹은 지독히 현실적인 프랑스 영화처럼 끝끝내 어떤 약점은 절대 고쳐지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우리 이야기가 아닐까? 내 안에 시트콤, 영화, 시, 심지어 랩까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가 멀티유니버스 플랫폼이 된 기분이다.
그것의 장르가 무엇이든, 그것의 스타일이 무엇이든, 사람마다 저마다의 장르와 스타일로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선명해지는 것은 약점이 아니라 그 약점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과 과정. 타인에게 손을 내밀고, 스스로의 약점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약점을 사랑을 위해 극복하고 맞서며 살아가는 과정이 자신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지점이다. 그 지점 지점이 모여 인생은 더 풍요로워진다. 그리고 낮게 읊조린다. 아, 아름다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