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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su Mar 13. 2022

<잃어버린 도시 Z> 실패를 위한 진혼곡

<The Lost City of Z>A film by James Gray

그렇게 주의력이 깊은 성격은 아닌지, 나는 영화를 보면서 온전히 집중하는 것 같진 않다. 특히나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이야기를 쫓아가느라 바쁘기 때문인지, '볼만하면 다음에 또 보면 되겠지' 같은 마인드 때문인지, 좋은 영화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때도 많다. 반면, 처음 볼 때는 당시의 컨디션이나 생각이 영화와 맞아떨어져 황홀할 만큼 즐거운 경험을 했지만 기대에 찬 재관람에서는 아무것도 충족 못하고는 약간 덜 떨어진 멍청이가 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쨌든 엔딩크레딧을 바라볼 때, '뭐지?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은 꽤나 참혹한 심정이다. 



결국 나도 영화를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닐까라는 의심, 이건 내가 기울였던 관심과 기대를 충족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과 같다. '아, 네 안일함과 게으름으로 인해 또다시 귀한 시간을 낭비했구나! 멍청한 녀석!'



나는 실패하는 자신이 두려워 아무것도 못하는 축에 드는 부류이지만, 이야기만은 패배하고 죽음을 맞는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언제나 희극보단 비극이 매력적이다. 그것이 카타르시스, 즉 비극에서 오는 감정적 정화작용인지 단지 내가 가학적 변태 성향인지는 몰라도 누군가 실패하는 것을 바라보는 건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바라본 비극이 예술적 형식으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비극은 일종의 실패를 위한 진혼곡이다.



'잃어버린 도시 Z'는 반사적으로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피츠카랄도'를 떠올리게 한다. 일단 정글과 무모한 도전이라는 키워드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물론 둘이 영화적으로 동일한 기대와 연출을 가져가진 않는다. 그저 반사적으로 '정글에서 무모한 도전을 하는 남자'라는 이야기가 불러오는 연상 효과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츠카랄도'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그림자인 레스 블랑크 감독의 '버든 오브 드림스'와의 연결고리 때문이다. '버든 오브 드림스'는 '피츠카랄도'를 찍기 위해 무모할 정도로 정글에서의 고통을 사주한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제작과정을 담고 있는데, 이 때문에 '버든 오브 드림스'의 베르너 헤어초크와 '피츠카랄도'의 피츠카랄도는 일종의 하나의 동일한 이야기를 구성하게 된다. 흔히 쓰는 표현이라면 '액자형 구성'이라고 해야 할까, 정글에서 무모한 도전을 하는 극 중의 남자와 실제의 정글에서 사서 고통받는 남자를 하나로 묶어 동일한 눈높이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잃어버린 도시Z'를 보고 피츠카랄도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나'를 뒤돌아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액자형 구성'이라는 말이나, '카타르시스'라는 단어나, '미장센'이라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말들이 대중들에게 너무 범용 되어 고유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이유랍시고 좋게 포장했을 경우이고, 단순히 표현하자면 그냥 내 반골의 성향이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욕심을 낸다. 무언가, 나만의 정형화된 단어들과 나만의 무언가를 사용해 나만의 것을 만들어내고 싶다고.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가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고 느끼며, 그렇다고 준비하고자 노력하는 편도 아닌 부류이다. 입만 산 부류라고 할까, 아마 나는 실패가 두려워 나만의 것을 영영 내놓지 못할지도 모른다. 준비가 덜 되었다는 핑계 때문에. 실패는 예술로서 바라볼 땐 아름답지만 현실에선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다시 돌아와서, 베르너 헤어초크의 말도 안 되는 억지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물론 나는 '피츠카랄도'는 봤지만 '버든 오브 드림스'는 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뭐라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아니, 나에게는 내가 생각한 무언가를 위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가 더욱 궁금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고집을 주창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무언가를 찾았다는 일종의 행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도시 Z'에서 그려지는 퍼시 포셋의 모습은 이것들을 생각하고 난 다음에야 이상적으로 보인다. 그 긴 세월을 품고 품은 자신의 명확한 꿈, 어떤 멸시와 고통이 따르더라도 끝까지 추구하는 그의 모습. 영화는 특히 퍼시의 모습에 감화되어 같은 꿈을 갖게 된 가족의 모습을 그리는데 이것 또한 너무도 이상적인 실패의 모습에 한발 다가선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함께 하는 꿈이라니, 이것은 실패해도 결코 실패가 아니게 되는 마법이 아닌가?



사실 영화를 그다지 집중해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 발견하진 못했는데, 영화의 첫 시퀀스인, 퍼시의 사냥하는 모습은 이후 영화에서 드러날 퍼시의 모습을 전부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길이 없는 곳으로 목표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무작정 달려 나가는 모습은 물론, 아들에게 자기와 함께 사냥하러 떠날 거라는 예언까지, 전체를 알고 나니 새로이 보이는 도입부가 아니던가. 아, 이것을 한눈에 발견하지 못한 나의 주의력에 한탄을!



실패는 두렵다. 비극은 예술의 힘을 빌어서야 아름다워진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비극은, 자신의 비극은, 그저 비극일 뿐이다. 그래도 이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고 싶다. 그것이 실패로 끝나든 성공으로 끝나든,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끝까지 달릴 수 있는 사람은 예술에서도 현실에서도 아름답다.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이 부럽다. 나도 그런 행운을 가질 수 있기를,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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