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영웅에 대한 메타적 접근
영웅 이야기
바스트 샷이 타이트하게 조여가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상처 가득한 얼굴과 비장한 표정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의가 담긴 핑거스냅, “I’m Iron man”. 이 장면은 분명 현세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영화 장면 중 하나다. 개인의 숭고한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구원, 그 결단과 행위가 담긴 이 짧은 바스트 숏은 관객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토니 스타크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자리 잡게 한 내러티브를 함께 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를 많이 아는 관객일수록 그의 희생과 상실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우리는 아이언 맨의 수많은 선택들을 지켜봤고 그 종착지가 영웅적 결말이라는 데에 감동을 느낀다. 따라서 이 짧은 쇼트가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감정적 울림을 선사했다면, 그것은 순수한 영화적 경험이기보다 13년의 시간 동안 정성껏 쌓아온 내러티브의 승리라고 보는 것이 옳다.
영웅적인 개인이 전체를 구원하는 이야기는 아이언 맨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신화화되기 이전에도 새로운 종류는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세상에 발자취를 남기면서부터 시작된 가장 오래되고 자주 반복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되새김질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영웅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매체를 뛰어넘는 본질적인 욕망임을 유추할 수 있다. 전 세계와 전 시대에 걸친 전설들과 신화, 그리고 살아 흐르는 시간 안에서도 인간은 반드시 영웅이라는 존재의 자리를 만들어 놓는다. 그 자리를 위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크게는 시대라는 거대한 흐름의 마중물이 되기 위해 작게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나타났다. 영웅에 대한 욕망은 영웅의 탄생과 동시에 그를 열망하던 이들을 잇는 구심점이 된다. 인간에게 영웅이라는 존재는 서로 간의 관념을 뚜렷하게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상징이다. 결국 사회라는 구조의 필요와 용인이 없다면 영웅이 등장할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웅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논픽션에서 태어난 픽션으로 볼 수 있다. 관념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일어서기 위해 영웅은 여러 번 이야기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영웅이라는 존재가 논픽션에서 픽션이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영웅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상징으로 자리 잡으려면 필요에 따라 선별되거나 창조된 이야기만 가지를 쳐가며 발전해야 한다. 무엇보다 영웅이 하나의 집단에서 공유하는 관념을 상징하려면 반드시 그 역인 반영웅적 존재를 가지기 마련이다. 모든 영웅에게는 간단명료한 선과 악의 대립을 설정할 수 있으며, 이는 효과적이고 명료한 이야기의 핵심이 된다. 그래서 영웅의 출현은 이미 갈등과 대립이 수면 위로 올라왔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영웅이라는 존재는 다시 픽션에서 논픽션으로 돌아간다. 영웅은 구조적 모순이 임계점에 도달했으며 이제 폭발할 것을 의미한다.
인류가 영웅 이야기에 지속적으로 매료되어온 이유가 욕망과 대립을 내포한 명료함때문이라면, 영웅 이야기가 가지는 미메시스는 표면이 아닌 심층에서 형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의 해체를 통해 그 속에 담긴 무언가를 탐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떠오른다. 물론 모든 영웅 이야기가 분석할만한 텍스트로 가득하진 않을 것이다. 욕망과 대립이라는 명료함이 사람들을 끌어모으듯, 영웅 이야기라는 미메시스, 환상 그 자체로 충분히 만족하는 모방체들도 마땅히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미메시스, 영화의 미메시스
영웅 이야기가 그렇듯 모든 이야기는 반드시 미메시스를 수반한다. 미메시스는 이야기를 단순히 인간과 세계를 재현하는 환상적 유희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과 세계를 잘게 썰고 이어 붙여 끈으로 단단히 묶어 재구성한 구조적 재현으로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오직 이러한 재현을 경험할 때, 개별성에서 발견되는 보편성, 노에시스를 일으켜 초월성에 다가가게 만드는 강력한 매개체를 조우하게 된다. 결국 모방과 재현을 통한 환상 그 자체만을 위한 이야기가 모방체로서 존재를 확장해왔다면, 이제 엄밀한 분석이 가능한 대상은 미메시스 그 자체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미메시스가 노에시스를 불러일으키는 방식뿐이다.
한편 영화는 미메시스에 관해서 할 말이 많은 매체이다. 태생 자체가 현상의 포착과 복제의 힘을 타고났기에 앞서 개별적 재현의 매체들이 가져왔던 공간적인 힘과 연속적 재현의 매체들이 가져왔던 시간적인 힘을 동시에, 그 무엇보다 강력하게 발휘할 수 있는 매체로 거듭날 수 있었다. 영화는 말 그대로 끝없이 살아 움직이는 운동성을 가졌다. 때문에 지금까지 미메시스를 만들어 온 매체들이 가졌던 연상적 참여 행위를 배제할 위험마저 가지게 된다. 특히 영화가 가진 완전한 포착과 복제의 힘이 내러티브를 구현하는 도구로써 종속당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무결한 선형성과 연속성의 체계를 형성해 내러티브의 구현과 전달을 위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너무도 강력하다. 그 결과, 영화는 인간의 지각과 상상력을 완전히 지배하는 형태로 변모했다. 모든 매체가 영화적이기 위해 노력한다. 다만 그 이유는 영화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대체 무엇인가?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인가? 영화를 봤다는 것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과 같은 행위인가? 그렇다면 영화를 이해했다는 것은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것인가? 더 나아가 영화에서 노에시스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은 이야기가 노에시스를 불러일으키는 방식과 같은가? 이를 논의하기 위해 영화가 발전한 방향에 따라,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 영화는 내러티브를 필수적으로 내포한다고 가정하고 둘을 비교 가능한 선상 위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영화와 이야기가 동일한 내러티브를 구현할 때, 둘의 엄밀한 구분점은 재현의 방식뿐이다. 결국 영화를 보는 행위를 영화적 경험으로 만드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영화의 미메시스인 장면이 내러티브와 동시적으로 무엇을 재현하는가 살피는 것이다.
불순한 영화
영화 ‘조커’는 2019년 9월, 76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당시 ‘조커’의 수상은 상당히 주목받을만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12년간 쌓아온 스물 세편의 한 단락을 끝마친 ‘MCU’라는 일렬의 시리즈가 영화시장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계는 범람하는, 그리고 더욱 범람할 코믹스에 기반을 둔 히어로 영화에 양가적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코믹스에 기반을 둔 영화가 주요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 한다면, 히어로 영화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하든 그 모두에게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영화는 자신이 태어난 본토에서 예상과는 다른 혹평에 직면한다. ‘조커’는 사회적으로 해롭고 용인될 수 없는 영화라는 비판이다.
‘조커’의 아서 플렉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이다. 그는 사회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받을 뿐 단 한 번도 자신이 필요한 공감을 받지 못한다. 사회에서 오직 부정만 당하던 인물은 총기라는 폭력을 손에 쥐고 쉽게 살인을 저지른다. 살인의 대상이 우연히 계층적 갈등을 대변할 수 있었기에 조커는 저항의 상징이 된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이 총기로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이 너무 사실적이고 끔찍하게 재현되어 미국의 현상을 반영함과 동시에 자극하고 부추긴다는 비판은 온당한가? 영화가 추동할 수 있는 비극을 예방하고자 ‘조커’의 상영관에는 삼엄한 경비를 필수적으로 수반해야만 했다. 이 같은 예방 덕분인지 몰라도 다행히 상영관에서 총기사건이 벌어지는 비극은 없었으며, 더 나아가 영화 ‘조커’에 영향을 받았다는 총기사건의 진술 또한 아직까지 없다. 그렇다면 ‘조커’가 사회적으로 해롭고 용인될 수 없는 영화라던 일부의 평은 미국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극단적인 비난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조커’의 사례를 통해 오히려 영화가 단순히 내러티브적 재현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아서 플렉과 고담
영화의 인트로는 라디오를 통해 사회에 쓰레기가 넘치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배경을 구현하며 시작한다. 카메라는 거울을 보며 분장하는 아서에게 다가간다. 아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극단적으로 입을 잡아당겨 윗꼬리를 올리고 내린다. 윗꼬리를 억지로 잡아 올린 상태에서 아서의 눈물이 파란색 분장에 섞여 흐른다. 1분 30초의 이 짧은 분장실 시퀀스는 영화의 배경과 주인공 모두 어떠한 결함이 있음을 효과적으로 암시한다. 장면은 곧바로 광각으로 담아낸 고담으로 연결된다. 아서는 광대 분장을 하고 패널을 돌리며 자신의 일에 열중한다. 그러다 갑자기 일종의 불량 청소년들에게 패널을 뺏기고 구타당한다. 아서가 이들을 쫓는 40초의 추격전은 ‘조커’에서 가장 다양한 숏의 변형을 주는데, 트래킹을 통해 아무런 이유 없는 괴롭힘을 즐기는 청소년들, 도움을 요청하며 절박하게 쫓는 아서를 각각 제시하고 동시에 다양한 시점 변경을 통해 아무런 관심과 도움을 주지 않는 고담의 시민들을 제시한다. 한편 인트로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전체를 암시하는 강력한 표현이다. 카메라는 구타당해 쓰러져 숨을 헐떡이는 아서에게서 점점 물러나며 서서히 포커싱의 범위를 넓혀간다(이는 분장실에서 아서에게 점점 다가가며 화면을 열었던 장면과 정반대의 움직임이다). 쓰러진 아서와 고담의 더러운 골목길이 어우러져 하나의 완전한 장면으로 자리하자, 노란색 JOKER 타이틀이 급작스럽게 침범해 화면 전체를 덮는다. 고담과 아서는 조커를 불러올 것이다.
두 시퀀스를 결합한 인트로는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으로 고담과 아서, 세계와 개인을 표현한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아서에게 다가가며, 아서의 내면을 살핀다. 아서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억지로 교정하려 한다. 두 번째 시퀀스에서 아서는 사회에 융화하여 자신을 교정하려는 노력을 계속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가해자와 방관자에 의해 무마된다. 카메라는 아서에게 멀어지며, 고담 한가운데 놓여진 아서를 담는다. 개인은 구조로부터 무력하다.
영화는 인트로 직후, 프레임을 가득 채워 아서의 기괴한 울음과도 같은 웃음을 파고든다. 클로즈업은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 주름 하나하나에 가득 새긴 슬픔을 직면케 한다. 인트로 첫 번째 시퀀스에 제시된 윗꼬리를 억지로 올리던 장면과 더불어 웃음은 ‘조커’의 심층적 표현 중 하나임을 짐작할 수 있다. 웃음은 긍정의 근원이자 전염의 매개체이다. 영화에서 아서는 분명 웃음이나 감정에 대해 무감하진 않다. 다만 일반적으로 웃음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과장된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버스 안에서 아이에게 친밀함을 표시하고 교류하지만, 그 보호자에게 강제적으로 단절당한다. 그러자 그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사장에게 자신이 받은 피해는 무시당하고 사장이 입은 피해는 책임지라고 추궁당한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기괴한 웃음이 번진다. 사회로부터 아서에게 부당한 부정이 가해질 때, 영화는 장면 전체를 웃음으로 덮어 지배케 한다. 조커는 부정의 근원이자 전염의 매개체가 될 것이다.
영화는 인트로 두 번째 시퀀스의 시작처럼 고담을 광각으로 자주 담는다. 공간감을 만들어 고담의 불길한 공기를 강조한다. 그러나 광각이 구현할 넓은 공간감 또한 거대한 건물들로 가로막고 통제하는 고담의 이미지를 강조할 뿐이다. ‘조커’는 고담이라는 공간을 제시할 때 크고 거대한 건물들이 프레임을 틀어막도록 한다. 이 건물들로 가득 찬 프레임 안에서 고담의 시민들은 고담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 거대한 건물들이 프레임 너머로까지 영역을 확장하기 때문에 고담 속에 아서는 마치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벽에 둘러 쌓인 느낌이 든다. 아서는 끝 모르게 높고 긴 건물들의 벽을 따라 오직 고담이 인도하는 단 하나의 길만을 걷는다.
웃음 그리고 춤과 계단
그렇다면 역시 고담이라는 배경 때문에 아서가 조커로 타락하게 된 것인가? ‘조커’의 인과관계는 단순히 아서 플렉이 사회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 분노를 추동삼아 폭력을 행사하도록 당위성을 부여하는가? 아서 플렉은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고담이라는 뒤틀린 구조가 그를 살인자로 만들었다는 것인가? 즉, ‘조커’는 사회에서 밀려난 계층적 피해자가 총기라는 폭력으로 구조에 대한 화풀이 내지 반란을 일으키고 오히려 그 때문에 추앙받는 구조의 역설을 보여주는 영화인가? 영화에서 아서는 분명 사회적 융화에 실패한다. 내러티브는 그의 실패를 만들기 위해 당위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아서 플렉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있고 끊임없이 괴롭혀지며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아서를 이상한 사람으로 수긍케 하는 장치는 그의 정신적 문제를 대변하는 이상한 웃음이다. 그의 웃음이 이상한 이유는 어린 시절 양어머니에게 당한 정서적, 육체적 학대 때문이다. 그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기에 끝없는 부재에 시달린다. 아버지의 부재는 머레이 프랭클린이 자신을 인정해주는 망상과 토마스 웨인에 대한 양어머니의 집착을 이어받게 만든다.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라는 존재마저 망상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그는 자기 파괴를 위한 마지막 쇼로 나아간다. 이처럼 단순히 내러티브만 쫓았을 때 영화는 아서가 구조에 의한 피해자이며 조커로 변모하는 것은 구조적 한계에 대한 반기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 이 간결한 인과의 내러티브는 영화의 시공간을 통해 효과적으로 펼쳐진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사건의 순서들을 재구성하며 플롯을 파훼한다면 누구나 위와 같은 결론으로 연결될 것이다. 다만 영화의 시공간이 내러티브를 위한 사건들을 재현하면서 무언가 더 새겨 넣지는 않았을까? 영화의 장면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 한다면 그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우선적으로 아서의 웃음은 분명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것 같다. 아서 플렉의 이상한 웃음은 영화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분명하게 변화하는 가장 커다란 시청각적 장치다. 아서는 다분히 사회적 체계에 순응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언젠가 유명한 코미디언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가 코미디언으로서 남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는 것은, 그가 웃음에 대해 다른 포인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과 정면으로 상충한다. 그래서 아서는 자신의 웃음에 대해 강력한 반발을 표하고 교정하려 든다. 그는 울음과 같은 웃음, 질환과 같은 웃음 등으로 자신의 웃음에 이름을 붙여 부정한다. 터져 나오는 자신의 웃음을 막기 위해 목과 입을 막으며 애를 쓴다. 남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포인트에서는 억지로 함께 웃으려고 한다. 다만 이 같이 사회의 규격에 억지로 자신을 들이미는 행위,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는 노력들이 오히려 ‘뒤틀린 자신’이라는 존재적 한계를 부각한다. 그를 끊임없이 더 많은 괴롭힘으로 밀어 넣는다.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믿음이 아서를 남들의 웃음거리로 만든다. 이는 반대로 보면 구조가 아서를 변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변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것 같다.
아서 플렉의 웃음이 병적인 무언가에서 탈피하여 다른 의미로 나아가는 시작점은 분명 첫 번째 살인의 시퀀스다. 그의 첫 번째 살인에는 특별히 다면적인 당위성을 부여하는 부분들이 있다. 무엇보다 특기해야 할 부분은 첫 번째 살인의 직접적인 유발 동기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살인에 앞서 그를 극단의 심리 상태에 처하게 만든 것은 해고와 동료의 배신이다. 그러나 아서의 첫 번째 살인은 자신에게 닥쳐온 이 불행을 해소하기 위해 사장이나 동료를 찾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지하철이라는 단절된 공간에서 타인에게 가해지는 위해를 전이받는 영웅적인 면모를 선택한다. 카메라는 아서에서 시작해 그의 시선을 따라 세 명의 금융인으로 옮겨간다. 롱 숏은 지금 이 공간이 완전히 폐쇄된 공간임을 강조한다. 이제 지하철은 건물의 벽에 둘러싸인 고담을 압축시킨 공간과 같다. 세 명의 금융인은 건너편에 앉은 여자를 괴롭힌다. 여기서 카메라는 장면을 완전한 아서의 시점으로 제시한다. 패닝으로 금융인에서 여자에게 시점이 옮겨갈 때 아서는 여자와 눈을 마주치게 된다. 이는 관객들에게 강력한 분노와 의기를 불어넣는다. 이제 그의 첫 번째 살인은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아서는 여자와 눈을 마주치자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이 웃음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그는 지하철에서 피해자가 아닌 방관자로 놓여있었다. 그러나 웃음이 폭력을 여자에게서 아서로 옮겨온다. 여자는 자리를 떠나지만 그는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는 타인과 같은 방관자로 남을 수 없다. 그는 구조로부터 멀어질 수 없다. 아서 플렉은 대체 무엇인가?
한편 세 명의 금융인이 아서에게 옮겨올 때, 그는 이전과 같이 자신의 웃음을 부정하며 설명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이번엔 아서 플렉이 자신을 부정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끊임없이 점멸되는 지하철의 전등처럼 그는 이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 아서의 공격성은 그 급작스러움과 같이 굉장히 강렬하게 제시된다. 그는 지금까지 보여준 불완전한 모습과는 다르게 정확하고 거침없는 기세로 살인을 실행한다. 그가 마지막 금융인을 쫓아 살해하는 신은 인트로에서의 추격신만큼 숏 전환이 잦지만 변형이 많지는 않다. 다양한 시점을 제시하지 않으며 POV를 통한 감정적 몰입도 배제한다. 이 숏들은 오직 아서가 행사하는 단호하고 냉철한 폭력으로만 집약한다. 아서는 살인을 실행하는데 일말의 망설임이나 여지가 없다. 그는 확실한 죽음으로서 존재한다.
아서는 폭력을 완벽히 끝 마치고 나서야 통제되는 모습으로 돌아온 듯 당황하며 도망친다. 그는 계단을 뛰어오른다. 거대한 지붕으로 덮인 역사와 아치형 터널을 지나 고담이 아닌 것 같은 공간, 탁 트인 길을 달린다. 그는 공중화장실로 들어가 자신을 가둔다. 공중화장실은 지하철을 상기시키듯 전등이 끊임없이 점멸된다. 아서의 떨림이 멈추고 몸을 움직이자 그의 의식(意識)은 다시 진정한 자신으로 연결된다. 동작이 진행될수록 죄의식은 사라지고 자신의 강력한 힘에 도취된다. 춤이라는 의식(儀式)이 끝났을 때 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이 무엇인지 직시한다. 아서 플렉, 조커는 죽음이자 폭력인 타나토스다. 그는 곧바로 망상 속 연인을 찾아간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고취시키기 위해 에로스를 빌려 오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계단과 춤 또한 ‘조커’에서 아서 플렉이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표현한 시각적 장치다. 계단은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귀환 시퀀스에 처음 등장한다. 이 시퀀스는 고담의 건물들이라는 거대한 벽들로부터 아서가 압도당하는 배치를 취하는 여러 숏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네 번째 숏에서 처음으로 계단이 제시된다. 아서는 거대한 벽과 같은 계단을 마주하고 고단한 뒷모습만으로 암담함을 그려내며 터벅터벅 오르기 시작한다. 그는 이를 시작으로 영화 내내 계단을 수없이 오르는데, 이 오름이라는 행위는 계층적 사회의 일원으로 융화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행해야 하는 작용처럼 보인다. 끝없이 오르려고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사회에서 오른다는 행위는 일종의 규율이자 사회적 합의를 따르는 것이다.
한편 ‘조커’는 아서가 첫 번째 살인 이후 해고당한 분장실에서 짐을 챙겨 나올 때, 처음으로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을 제시한다. 그는 솔직하고 과장스럽게 자신의 증오를 표출한 뒤, 유독 즐겁고 가벼워 보이는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영화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보는 황홀한 표정의 아서가 상영관의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두 번째로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파괴를 위해 스튜디오로 떠나며, 귀환 시퀀스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거대한 벽과 같은 계단을 춤추며 내려간다. 아서는 계단을 내려갈 때 언제나 진심으로 즐거워한다. 내려간다는 것은 억지로 거스르려는 힘을 거두고 본질에 자신을 맡기는 행위다.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은 그가 사회의 규율과 합의를 쫓아 남들과 융화되는 대신, 타나토스로서 존재하겠다는 본능적 움직임이다.
그렇다면 춤은 어떠한가? 아서는 총기라는 폭력을 손에 쥐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집에서 홀로 과시적인 춤을 췄다. 그는 첫 번째 살인 이후 공중화장실이라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폭력에 도취하는 춤을 춘다. 그리고 자신이 곧 궁극적인 폭력임을 선포하는 마지막 쇼를 위해 떠나며 계단에서 혼자만의 기념의식에 빠진다. 춤은 아서가 본인이 조커이고 타나토스임을 알리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지금까지 전부 혼자만의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계단에서의 과격한 의식조차 경찰의 시선에 포착되자 멈추고 부리나케 도망가야 했다. 그러다 스튜디오에서 아서는 자신의 웃음을 자꾸만 부정하는 머레이와 세상의 기준에 대한 증오가 차오른다. 아서는 스튜디오의 커튼 뒤에서 스태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처음으로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는 춤을 춘다. 그가 궁극적인 폭력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기 파괴가 아닌 폭력의 공표를 결심한 것이다. 아서는 이제 조커로서 고담의 완전한 타나토스를 안길 것이다.
영웅의 등장
머레이를 살해하고 경찰차에 실려가는 조커는 창 밖으로 불타는 고담을 바라보며 마음껏 웃고 즐거워한다. 이 구도는 버스 시퀀스에서 아서 플렉이 다리를 넘어가며 고담을 바라봤던 구도와 동일하다. 하지만 고담의 상태만큼 둘의 표정도 정반대다. 그는 처음부터 파괴와 폭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존재였음이 분명해진다. 조커는 희극이 아닌 비극을 위한 웃음이자 박수갈채이다. 아서 플렉의 이상한 웃음은 질환이 아닌, 그를 조커로서 정의하는 상징이었다. 광대 가면을 쓴 폭도들은 경찰차를 들이받고 아서를 꺼내 받든다. 광대 가면은 이미 고담이 조커를 필요로 한다는 기전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고담은 조커라는 폭력과 비극을 요구하며 아서 플렉을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그래서 아서의 우상적 화편화는 그가 꿈꾸고 바라던 코미디 무대의 또 다른 구현이 되며 압도적인 힘을 가진다. 조커는 피로 자신의 웃는 얼굴을 만든다.
‘조커’에서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는 과정은 영웅 이야기를 해부해서 나온 메커니즘과 동일하다. 고담이라는 구조는 이미 그 모순이 임계점에 도달해있었다. 아서 플렉은 구조적 모순으로 생겨난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동시에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개인은 구조로부터 무력하기에 아서 플렉에겐 조커가 되는 길밖에 없다. 조커는 폭력과 비극을 위해 만들어진 구조적 산물이다. 그가 등장했을 때 이미 수면 위로 올라온 갈등과 대립이 그를 ‘저항’이라는 관념으로 삼으며 환호한다. 그는 고담이 가장 필요로 하는 영웅이다. 조커는 구조를 통해 요구되며 구조에 의해 탄생한 영웅이다. 아웃트로에서 아서 플렉은 자신이 만든 비극들과 만들 비극들을 떠올리며 즐겁게 웃는다. (그의 웃음 사이에 삽입된 브루스 웨인이 홀로 남겨진 장면은 조커가 불태운 고담이 새로운 구조로 작용하며 배트맨을 만드는 끝없는 구조의 연쇄를 연상시킨다) 뭐가 그렇게 웃기냐고 묻는 상담의에게 너는 이해 못 할 거라는 대답을 하는 그의 소름 끼치도록 당당한 얼굴은 이제 고담이 그에게 요구하던 완벽한 조커이자 타나토스의 현신이다. 나는 클로즈업이 제시하는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순식간에 아서 플렉의 내면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웃음 속엔 이제 진정한 폭력과 비극만이 깃들어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구조가 개인을 만든다는 파괴적인 진술 앞에서 영웅과 피해자는 단지 한 끗 차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