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정처 없이 걸어도 좋은

베트남 후에

by Atsu

4월 8일, 후에는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수도답게 가장 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흐엉강을 바라보는 후에 황성을 중심으로 근교에 수많은 황릉이 존재하는데, 황릉을 보러 교외로 나가려면 대중교통이 없어 유명한 곳을 한두개만 왔다갔다 하려해도 꽤 금액이 크다. 조금 찾아보니 미선유적 때처럼 투어를 이용하는게 더 저렴히 먹히는 것 같다. 내일 황궁과 두 개의 황릉을 방문하는 투어를 예약하고 살짝 불안한 마음에 숙소 직원에게 통화를 부탁해 확실히 픽업 시간까지 들어둔다.


유명한 곳들은 내일 가볼 테니 오늘은 자유롭게 가고싶은대로 걸어보려한다. 지도를 보면 황성 바깥쪽에도 커다란 정사각형의 해자를 만들어 황궁의 해자와 함께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수도를 건설할 때 계획적인 성채로 도시 전체를 구획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과 비교하자면 사대문의 안쪽과 같은 이곳에 황궁말고 볼만한 것이 있을까 찾다보니 왕조의 도서관이라는 곳이 눈에 띈다. 해자를 만들며 황성 내 흐르게 된 수로와 만들어진 호수들도 보고 싶던 차였는데 이곳에 가면 주위를 걸으며 다 볼 수 있을 거 같다.


일단 점심부터 먹고 그랩을 불러 가보기로 한다.

숙소에서 살짝 위쪽으로 올라가니 있는 분보후에 가게, 안타깝지만 어제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베트남에서 쌀국수를 먹을 때는 대부분 이 국수 위에 올라간 고기가 맛을 상당히 좌우하는 것 같다. 고기에 정성을 들인 만큼 맛이 좋아진다는게 내 느낌이다. 오늘 날씨가 살짝 더워 뜨끈한 국수가 들어가니 땀이 난다. 물론 아직까지 습하지도 않고 동남아라는 느낌이 전혀 안 들지만.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으로 바로 그랩을 불러 이동한다. 황성 내부는 계획된 성채 도시였던 만큼 현대의 도로도 제대로 구획화가 되어 정말로 딱딱 직선과 직각으로 나누어진 것 같다. 그럼에도 기사님은 도서관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는지 지도상 목적지를 살짝 지나치고 당황하며 웃으신다. 나도 창밖으로 무슨 입구 같은걸 본 적이 없어 당황했지만 일단 차에서 내려 거슬러 올라가본다. 오래되어 보이는 상점 겸 주택들 사이로 있는듯 없는듯한 입구가 있고 거길 살짝 넘어가니 역사가 느껴지는 다리와 건물이 나온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 나올 때 입구에서 찍은 이 한 장뿐이다. 도서관 내부에는 응우옌 왕조에서 여러 행정을 위해 쓰였을 직인이 찍힌 문서들을 볼 수 있다. 다만 문서는 한자고 설명은 베트남어라 어떤 문서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건물 반대편에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어 올라가본다. 호수 건너편으로 사원과 바나나나무, 민가들이 어우러져 경치가 좋다.


2층 내부를 둘러보려다 갑자기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과 마주쳐 깜짝 놀랐다. 상주하는 연구원이 웃으며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특히 반겨주는 카이스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한국유학생 출신이다. 이 건물은 응우옌 왕조 때 기록물 저장소로 활용되었지만 현재 원본들은 전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건물이 오랫동안 방치되었던데 비해 기능적으로는 탁월했는지 원본들의 상태가 다 좋은 채로 보존되었다고.


연구원분과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베트남의 볶음밥 양이 왜 그렇게 푸짐한지 알 수 있었는데, 이 분은 한국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대체 왜 이렇게 밥을 적게 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즉 베트남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밥을 많이 먹어 볶음밥의 양도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것, 그 정도가 원래 베트남 사람들이 밥을 먹는 양이다. 신선한 야채를 산처럼 쌓아주는 것도 동일한 이유로, 채소 가격이 우리 기준 말도 안 되게 저렴하기 때문에 대부분 채소와 쌀 위주의 식사를 한다. 반면 고기 가격은 농산물에 비해 훨씬 비싸기 때문에 식당에서도 고기로 만든 짜조가 애피타이저 같은 메뉴인데도 불구하고 메인인 쌀국수보다 비싸다.


아무래도 한국에 유학 경험까지 있으니 상당히 친한파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느끼는 한국콘텐츠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다. 이 분의 견해로는 베트남 사람들이 특히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극의 전개속도가 급박하고 빠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도 오징어 게임과 같은 넷플릭스 시리즈가 외국에서 영향력이 커질 수 있었던 이유는 할리우드식 속도감 있는 연출과 전개를 가장 빨리 이식해오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특히 자본을 비롯해 더 많은 것이 투자된 넷플릭스 시리즈와 일반적인 TV드라마의 연출에는 정말 큰 차이가 느껴지는데, 사실 TV드라마는 장면의 절반 정도를 얼굴 클로즈업으로 때운다. 그래서 드라마란 장면구성에 성의 없고 보는 맛이 없어 대본으로 때우는 것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넷플릭스 시리즈에서는 그래도 장면마다 좀 더 연출을 가미하는 경향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더 세련되고 속도감 있는 영화적 전개가 가능하고 더 많은 세계에 어필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후에만의 그림을 눈앞에 배경으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 악수를 나누고 서로 한국에 대한 애정과 베트남에 대한 애정에 감사하며 헤어졌다. 차를 타고 내렸던 길 건너편에 작은 호수와 섬이 조성되어 있어 넘어가본다.


호수를 둘로 가르는 길 위에서 후에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다. 정작 그 길 양쪽으로 붙어있는 나무다리를 따라 건너간 섬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중앙에 정자를 두고 사방으로 길을 내 놓았는데 그 길과 길 사이는 푸르게 자란 풀잎 너머 나무로 지붕을 덮은 언덕이 자리잡고 있다.

꽤나 성의있게 구조를 갖춰놨는데 정작 그 중심의 정자는 태풍이라도 맞은 듯 초라한 느낌인게 재밌다.

볕이 따스해 나른한 풍경에 빠진다. 돌아갈까 생각하다 길을 따라 호수 너머까지 가보기로 한다. 민가가 보이고 베트남에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수많은 공사판이 나를 반긴다. 길을 따라 계속 걸으니 진짜 후에 사람들이 사는 골목이 나온다. 학교 체육관인지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리는 건물을 지나 작은 매점에서 이온음료를 하나 산다. 베트남엔 꽤 특이한 느낌의 맛있는 음료가 많이 판다. 가격도 저렴하니 매점을 들릴 때마다 여러가지를 시도해 보는 맛이 있다.


음료를 들이켜며 진짜 사람들이 사는 골목을 지난다. 골목마다 빨래가 걸려있고, 살짝 들여다보면 마당과 거의 같은 높이에 나무 바닥 깔린 거실이 보이곤한다. 그 낮은 거실바닥에 앉아 TV를 보거나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있다. 골목을 돌고 돌아 도로로 나가니 이발소, 세탁소, 아이들이 간식을 사먹는 노점들을 지난다. 뭔가 좀 사먹을까 고민하다 슬슬 다음 목적지인 동바시장으로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후에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동바 시장, 굳이 시장에서 뭘 살 생각은 없지만 베트남시장이 어떤 곳인지 둘러보기에 이만큼 적당한 곳은 없다.

온갖 음식물과 간식류, 금은방, 기념품, 잡다한 공산품, 산처럼 쌓인 신발과 옷들, 그 복잡함과 크기가 엄청났다.

사람 한 명 지나다니기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옷 가게에 당황스럽다.

건물 밖 강가 쪽에는 정말 수없이 많은 농산물들이 팔리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수박산과 나무 통째로 썰어온 바나나도 있다.

걷다보니 어느새 엄청난 수의 오토바이가 건너는 다리를 마주한다. 여기 시장이 끝나는 곳에 마트가 들어선 건물이 있는게 재밌다. 언뜻보면 경쟁자같지만 자세히보면 대체재보단 보완재 느낌이 강하다. 롯데리아에 들어가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하나 주문해 나온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강변으로 내려가니 많은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간식인지 저녁인지를 나눠먹고 있다. 나도 벤치에 앉아 멍하니 강을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강을 따라 황궁 방향으로 내려가니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뛰는 중이다.

어느새 해가 지더니 아까 그 다리가 형형색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화려하게 빛나는 다리를 건너간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황성은 좀 더 푸릅게 보인다.

여긴 구시가보다 좀 더 화려하게 조성되어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카페 같은 시설들이 많다. 강을 따라 내려가면 어제 갔던 복잡복잡한 나이트 워킹 스트리트로 이어진다.

이번엔 거리 가장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식사를 해본다. 메뉴에 후에 특식이라는 것들 중 하나를 주문한다. 라이스페이퍼로 만든 만두 같은 느낌, 식사로는 부족해 어제 갔던 식당이 생각난다.

2차를 위해 돌아온 가게는 손님이 없어 뭔가 어제보다 생기도 사라진 느낌이다. 생맥주가 떨어졌다해 병맥주를 주문하고, 한번도 안 먹어본 비빔국수를 주문해본다. 어제보다는 확실히 만족감이 떨어지는 식사다. 역시나 면 위에 올라간 돼지고기가 성의없는 느낌인게 크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나와 식욕이 좀 떨어졌다. 뭐, 어제도 사실 쌀국수를 갖다줄때 국물에 손가락이 들어가있는둥 이런 일은 다반사기 때문에 그냥 먹는다. 그게 베트남이니까,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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