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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su Dec 21. 2020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삶은 지속되어야만 하는가?

Novels by Fyodor Dostoevsky

 “바로 그겁니다, 구역질 난다라는 겁니다! 당신은 의심이 많아져서, 내가 당신에게 야비하게 아부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살았나요? 그렇게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나요? 이론을 하나 생각해 냈는데, 그게 깨지고 전혀 독창적이지 못한 결과가 돼 버려 부끄러워진 거로군요! 결과가 비열하게 됐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구제불능의 비열한 인간인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비열한 인간이 아닙니다! 적어도 당신은 오랫동안 자신을 속이지 않고서, 단번에 마지막 기둥까지 가 버린 겁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당신을 만약 신앙이나 신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설령 내장을 잘라 낸다 해도 꿋꿋이 서서 미소를 머금고 박해자를 바라볼 그런 사람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그것을 찾아내십시오. 그러면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첫째, 이미 오래전부터 공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어요. 어때요, 고난도 좋은 겁니다. 고난을 받으십시오. 어쩌면 고난을 원하는 미콜카가 옳을지도 모르지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교활하게 잔머리 굴리지 말고,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곧바로 삶 속으로 뛰어드십시오. 두려워할 것 없어요. 곧장 강기슭에 데려다가 두 발로 서게 해 줄 겁니다. 어떤 강기슭이냐고요? 내가 어찌 압니까? 나는 다만 당신이 아직도 많이 살아야 한다고 믿을 뿐입니다. 당신이 지금 내 말을 달달 외운 설교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훗날 떠올리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그 노파만 죽인 건 그나마 다행입니다. 만약 다른 이론을 생각해 냈다면, 일억 배나 더 추악한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지도 모르지요. 어떻게 당신이 알겠습니까. 어쩌면 무언가를 위해 하느님이 당신을 아끼시는 건지도 모르잖습니까. 당신은 마음을 크게 먹고 그렇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앞에 놓여있는 위대한 실천 때문에 겁이 난 겁니까? 아닙니다. 여기까지 와서 겁을 낸다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 첫걸음을 내디딘 이상,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바로 거기에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니 정의가 요구하는 것을 실행하십시오. 당신이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맹세코 삶이 이끌어 줄 겁니다. 나중엔 스스로도 마음에 들게 될 거예요. 지금 당신에겐 오로지 공기가 필요합니다, 공기, 공기가!”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을유문화사, 번역 김희숙>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결국 예술이 남긴 발자취를 돌아볼 땐 대부분 서구의 예술을 다루게 된다. 물론 소설이라는 형식에 있어 일본의 '겐지 모노가타리' 같은 서구 외의 것이 역사에 가장 중요한 편린으로 자리 잡은 경우도 있지만, 소설을 다룰 때 우린 보통 로맨티시즘과 리얼리즘이 지배하던 19세기의 유럽을 중심으로 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될 경우, 소설이라는 예술이 지닌 사상들은 완벽히 서구에 기반된 것이 되고, 그것은 서구의 정신에 따라 읽혀야만 한다. 한편 20세기부터 시작된 일종의 모더니즘과 그 너머의 것은 더 이상 단순히 서구의 것으로부터만 비롯된 게 아닌, 전 세계적인 흐름이자 영향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오히려 유럽의 작품이라 할 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서구 정신의 산물이라고 칭하기 어렵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서양 문학의 시작을 호메로스로 놓았을 때 그 끝은 도스토옙스키이다.


 

인간은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상은 불온함의 씨앗인가? 불완전한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의심하면서부터 인간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갈망을 숨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초월적 존재의 부재는 인간의 윤리적 틀을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며,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초월적 존재로 여기게 만든다. 여기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끝에 도달할 수 없는 투쟁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완전함이라는 허상을 위한 투쟁, 유물론에 기반한 무신론적 시선은 인간을 한 단계 위로 올려놓는가, 아니면 무너뜨리는가? 불완전한 세상과 불완전한 존재를 확연히 인식함으로부터, 인간은 지금까지 자유의지에 기반하여 쌓아 온 서구 사상을 무너뜨린다. 그리곤 역설적으로 자유의지 또는 자신이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불합리한 세상을 부정하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부정한다. 초월적 존재 대신 닿을 수 없는 이상과 이론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닿을 수 없는 이상, 세계의 불완전함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 인간은 삶이라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게 되는데, 불완전함을 인식하면서 비롯되는 고통은 불안한 존재를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의 존재와 불완전한 세상에 대한 증오가 자신을 갉아먹을 때, 인간은 더 이상 현실을 마주할 수 없게 된다. 이론과 이상에 갇힌 채 빠져나올 수 없다. 오직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존재할 것이고 삶은 계속된다. 불완전함을 극복하는 길은 자신의 존재를 말살하는 것뿐이다. 죽음이라는 쉬운 해결책을 외면하고, 비틀거리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린 불완전함을 껴안고 나아가야 한다. 극복할 수 없는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 인간과 세상이라는 불합리함에 대한 아가페, 불완전함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껴안고 나아가야 할 대상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를 보듬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야만 한다. 이로부터 삶은 권리가 아닌 의무가 된다. 불행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찰나의 기쁨을 위해 삶을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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