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디렉터 김유경이 바라보는 세상
시계제로 (視界 Zero). 시력이 미치는 범위 시계와 Zero 의 합성어로 시야가 가려져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말합니다. 지난 2020년은 한마디로 ‘시계제로’ 한 한 해였습니다. 문화, 예술, 여행, 레저 분야는 초토화였고 정치, 경제, 사회는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찼으며, 의료 및 교육서비스는 극심한 격동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성장하고 있는 산업은 있었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라이프 스타일은 변화하고 있고, 특히 식문화는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토고납신 (吐故納新). 옛 일을 털어버리고 새로이 출발한다는 사자성어인데요. 2021년에는 그동안 우리가 고수해왔던 고전적인 삶의 방식 대신에 다가오는 변화를 준비하고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맞이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본 콘텐츠는 SPC 매거진 2021년 1월호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소비자 측면에서 가장 크게 겪고 있는 변화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재택 근무와 원격 교육이 이루어지고, 홈 액티비티 (홈스쿨링, 홈트레이닝, 홈쿡 등) 가 발달하면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고전적인 의미의 집은 씻고, 잠자고, 쉬는 공간이었지만 요즘의 집은 업무 공간이자 촬영 스튜디오, 학교, 사교와 모임의 공간 등으로 역할이 확대되며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죠.
소비자가 겪는 첫번째 변화는 출근시간에 쫓겨 먹지 못했던 아침 식사를 여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빠르고 간편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영양가있는 상품들이 잇따라 출시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뜨거운 물만 부워서 만들어먹는 컵사이즈 팬케이크,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 오믈렛, 식물성 단백질로 만든 소시지 등을 만날 수 있고, 국내에서는 5분이면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 다섯가지 나물밥과 불고기 오믈렛, 취나물밥과 매콤 제육볶음, 닭가슴살 미트볼 커리 등 단 한번의 조리 과정으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상품들이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아침식사 뿐만이 아닙니다.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밀키트와 가정간편식 (HMR) 상품들뿐만 아니라 레스토랑의 음식을 전국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RMR (Restaurant Meal Replacement) 또한 올해 새로운 전성기를 맞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배달’이라는 것은 식당을 중심으로 반경 00km까지만 할 수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RMR 상품은 전국 어디서든 해당 레스토랑의 메뉴들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소비자 입장에서는 선택권이 더 늘어나게 되는 것이죠. 대표적인 상품으로 라그릴리아의 볼로네제 스파게티, 명란마요 라이스, 할라피뇨 소시지 라이스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기대되는 또 하나의 분야는 키친과 다이닝룸에서 사용하는 주방용품과 커틀러리의 확장입니다. 우리 동네를 넘어 다른 지역에 있는 미쉐린 레스토랑의 라쟈냐와 스파게티를 집에서 먹는데, 일반 접시에 담아서 먹고 싶을까요? 인스타그램에 인증샷 한 컷이라도 남기기 위해, 또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것처럼 잘 차려먹고 싶은 것은 사람의 욕구이기 때문에 음식이 돋보이는 화려한 접시와 포크, 나이프, 와인잔 등에 대한 수요는 늘어나고, 요리를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한 다양한 주방용품에 대한 장바구니도 커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공급자 측면에서 겪고 있는 가장 큰 변화는 온라인 환경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제공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콘텐츠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콘텐츠는 소비자들이 엄지 손가락으로 스크롤해가면서 구입할 수 있는 온라인 판매망을 구축하는 유통부문입니다. 약 2~3년전부터 식품의 온라인 소비는 늘어나고 있었지만, 코로나 19가 기폭제가 되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만큼 온라인 환경에 소비자들이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소상공인들은 보유하고 있는 상품이 2~3개 밖에 없어도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 자신들의 상품을 판매하고,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도메인을 구입해 온라인 쇼핑에 최적화된 자사몰을 운영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온라인으로 구입하면 멤버쉽 포인트나 제휴 카드사 포인트를 적립/사용할 수 있어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고, 1~2일이면 집 앞으로 배송되기 때문에 어깨에 매고 다니던 장바구니를 사용하는 빈도는 더욱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풀필먼트 (Fulfillment) 서비스의 공격적인 성장으로 판매자들이 물류를 온라인 사업자가 지정한 물류센터에 입고하고, 물류 전문업체가 재고관리, 포장, 배송, CS 등 물류 전반을 대행해주며 당일배송, 새벽배송은 당연해지고 있어, 조금 더 빠르고, 신선하고, 저렴하게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공급자가 살아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공급자가 놓치지 말아야할 두번째 콘텐츠는 인터렉티브 콘텐츠입니다. 과거에 TV, 라디오, 신문, 포털 사이트의 배너 등은 공급자가 소비자에게 일방적으로 자사의 상품과 브랜드를 보여주는 원웨이 (One-Way) 콘텐츠였습니다. 인기있는 모델을 섭외해 광고를 찍었으니 좋은 결과가 있겠지라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2019년에 모 대기업의 세제 광고 영상이 소셜네트워크 채널에 등장하였는데, 소위 ‘병맛 콘텐츠’라고 할 정도로 코믹하고, 모델 하나없이 까만 매직팬으로 찍찍 그려 만든 B급 감성 영상 소비자들을 까무러치게 웃게 만들어 회자되기 시작했고, 해당 영상은 유튜브 조회수 200만회 돌파, 판매량은 40% 이상 증가했습니다. 그 이후로 광고 시장은 소셜 네트워크 채널을 주목했고, 클릭하면 해당 상품으로 이동하는 제품 태그, 장소 태그, GIF 등을 이용해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만들고, 브랜드 채널이 소비자의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DM 메시지를 보내는 등 브랜드와 소비자가 소통하는 인터렉티브 콘텐츠를 만들며 친근감을 더하기 시작했습니다. 콘텐츠에 발빠른 브랜드는 인플루언서와 크리에이터와 협업을 하며 온라인 채널에서 소통을 하고 있고, 더 발 빠른 브랜드는 소통 그 이상으로 재미를 주고 유대관계를 만들어 소비자에게 친구 같은 콘텐츠를 만들고 있습니다. 소비자와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터렉티브 콘텐츠는 더욱 더 다양해지고, AR이나 VR과 같은 고도화된 서비스와 콜라보하여 생산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세번째 콘텐츠는 환경 콘텐츠입니다. 기업은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해 이윤을 내는 것이 목적이지만 동시에 사회와 환경에 이로운 영향을 미쳐야 좋은 기업으로 기억됩니다. 푸드 환경 분야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할 부분은 ‘패키지’입니다. 전자제품, 가구뿐만 아니라 밀키트, HMR 등을 주문하면 택배 상자, 포장지, 내외장재, 아이스팩 등 제품보다 더 많은 쓰레기가 생깁니다. 집에서 밀키트를 주문해 조리를 시작하다보면, 포장을 뜯다가 지치기도 하고, 한 켠에 쌓여있는 플라스틱과 비닐을 보고 있으면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의 밀키트 회사는 100% 밀짚으로 만든 재활용 용기와 생분해 비닐 등을 사용해 쓰레기가 소각장이 아닌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환경 보호를 위한 패키지로 개선하고 있습니다. 제품 자체뿐만 아니라 패키지도 사려깊게 생각하는 브랜드라면 그 자체로 소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또한 전세계적으로 콩 단백질이나 곤약, 밀 등 100% 식물성 단백질로 대체육을 만드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고, 맛도 좋아지고 있어 대체육에 대한 연구와 비건 상품 개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샌프란스코에 본사를 둔 잇저스트 (Eat JUST Inc.)는 국제적인 식물성 식품을 생산하는 곳으로 마요네즈 대체품, 드레싱, 쿠킹반죽, 아침식사 대체 단백질 등을 맛볼 수 있는 저스트 에그 브랜드를 설립하였으며, SPC 그룹이 저스트 에그 브랜드를 국내에 도입해 오픈 직전부터 큰 인기를 몰았습니다. 특히 저스트 에그의 핵심 재료는 ‘녹두’로 녹두 단밸질을 활용해 날달갈처럼 겔을 만들어 응고시키며 식물성 달걀의 주요 재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020년은 잊고 싶을정도로 모두에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한 해였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조류 속에 있습니다. 파도가 클수록 큰 서핑 보드가 필요하고, 파도 타기 속도는 훨씬 빨라지는 것처럼 2021년의 트렌드를 새로운 시대의 도래로 받아들이고, 즐겁게 서핑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글 | 푸드디렉터 김유경 (안젤라)
이메일 | angelakim@tasty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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