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사이트] 아름다움을 느끼는 비결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 계기는 2011년 겨울날, 유럽의 미술관에서 느꼈던 당황스럽고 마음 아픈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두 달 간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각 도시의 유명한 미술관과 박물관을 전부 방문할 계획이었다. 마음이 한껏 들뜨고 기대감에 벅차오른 상태였다.
먼저 다녀온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기대가 되었다. 세계적인 화가의 작품을 직접 보면서 엄청난 감동을 받아 눈물 흘리는 이도 있고, 작품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아우라에 넋을 놓는다는 경우도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계속해서 바라보게 만드는 몰입감이 대단하다는 이도 있었다. 사람들의 감상평만 들어도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나도 비슷한 감정적인 울림을 느끼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미술관에 방문해서 그토록 고대하던 작품들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을 때 난 어땠던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어떤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무미건조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미술관을 돌아다녀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작품을 실제로 보아도 아무런 감동도, 감흥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나먼 유럽까지 왔는데 예술 작품을 보고 아름다움은 커녕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내가 고장 난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내가 배경지식이 없어서, 이론적인 해석이 부족해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닐까? 온갖 혼란스러운 감정과 생각이 쏟아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다.
결국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해당 작품의 두꺼운 해설집을 들고 다니면서 작품 앞에서 해설집을 펴놓고 줄줄 읽는 것이었다. 이 작품이 왜 아름다운지, 어떤 점에서 특히 아름다운 것인지, 작품이 어떤 의미가 있고 왜 명작이라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인지. 두꺼운 책에 빼곡히 씌어있는 해설을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작품을 보면서 아름다움과 감동을 느낄 것을 강요했다. `이 작품은 이 부분이 뛰어나고 묘사를 잘했고 어떤 의미가 있어서 아름답다`라고 해설서에 적혀있으니까 얼른 이해해봐.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노력해봐. 감동을 느껴봐`라며 스스로 억지 감상을 강요하였다.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감정과 생각, 감상이 아니라 지루하고 재미없는 해설서에 적힌 전문가의 의견을 느끼도록 스스로 강요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통탄스러울 정도로 안타까운 해결책이었다. 그때는 내가 할 수 있었던 나름의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사실 그건 끔찍한 주입식 교육의 폐해였다. 어째서 나는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세심한 감수성을 잃어버렸는가?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였다. 도대체 예술 작품의 본질이 무엇이길래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 이론적인 지식과 해설이 필요한가? 어째서 나는 억지스럽게 예술의 감동과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렀나? 쓰디쓴 현타가 밀려왔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나 자신이 수치스러웠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수성과 세심한 감각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아서 눈물이 흘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왜 나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앞에 놓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한 인간이 된 것일까? 원인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건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초,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어린 아이의 풍부한 감정과 세밀한 감각, 감수성은 뿌리 뽑힌 채 힘을 잃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배운 것은 예술 작품에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어 무자비하게 뼈와 살을 갈라내고 해체하여, 조각난 부분을 분석하고, 규정하고, 암기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시를 조각내고 해체하여 정형화된 프레임을 씌웠다. `이 단어는 여기서 이런 뜻과 상징으로 쓰였어. 이 구절은 이런 의미야. 그냥 암기하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를 해체하고 분해하여 이름표를 붙이는 잔인한 과학자가 떠올랐다.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을 그 자체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식과 구성인지 암기하는 데 급급했다. 아름다운 그림 작품을 보며 내 마음에 피어오르는 감정과 영감을 음미하는게 아니라 머리로 온갖 이론적인 지식을 암기하느라 바빴다.
예술 작품 자체로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감정적인 파동을 느껴보고, 나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여러 가지 감상과 감정을 머금고 깊이 느껴봐야 했다. 하지만 학교 수업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모조리 조각내어 분해하고 이론을 암기하는 것이었다. 그건 마치 향기로운 장미꽃과 팔랑이는 나비의 아름다움을 파악하겠다면서, 장미꽃과 나비를 잡아다가 분해하고 뜯어내어서 각 부위의 명칭, 용도, 형태 등을 알려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러한 학업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러운 감수성과 섬세한 감각,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해석과 감상평은 모두 통제 당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오로지 이성과 논리로 가득한 분석가와 암기왕, 비평가가 되어버린 나만 남아있었다.
또한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 과목의 시험도 치렀기 때문에 어떤 작품을 접하든 선생님이 좋아할 만한 `정답 감상평`을 찾는데 모든 포커스를 맞추었다. 이게 습관이 되다 보니 어떤 예술 작품을 보더라도 진솔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개인적인 감상이 아닌 그저 사회가 정해주는 정답, 학교 시험에서 정답이 될 것 같은 감상을 추론하기에 바빴다.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감상은 모두 배제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이 동의할만한 감상을 찾기 위해서 머리와 이성으로 `정답에 가까운 감상평`을 추리했다. 정답 사회에 익숙해지다 보니 예술을 보면서 느끼는 개인적인 감상조차도 당연히 정답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 지금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이 참 안타깝고 슬프게 느껴진다. 이러한 정답 사회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수성과 감각을 억압하는 잔인한 행태로 느껴졌다. 동시에 인간이 자유롭게 감정을 느끼고, 독창적으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고 정답만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자라다가 나의 감수성이 처참하게 망가졌구나. 마음이 아팠다.
자연의 아름다움,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과 시야가 과연 지식을 암기한다고, 관련 이론을 배운다고 풍성하고 다채로워지는 것인가? 과연 머리로만 학습하는 것이 감수성을 풍부하게 일깨우고, 작품에 녹아든 작가의 감정 파동과 마음을 단숨에 직관적으로 느끼는 데 도움이 되는가? 하는 의문이 올라왔다.
나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은 두꺼운 해설서와 책에 적힌 온갖 지식보다는 풍부한 감수성과 예민한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억눌리고 배척당했던 감수성과 감각을 뒤늦게 일깨우고 나서 예술 작품을 볼 때 확연히 달라진 점을 느꼈다. 이건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배운 것이다. 감수성과 세밀한 감각을 되찾고 나서는 배경적인 지식이나 이론이 없어도 섬세하고 풍성한 감각 덕분에 자연스럽게 아름다움과 감흥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느껴지는 감정적인 울림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만족감이었다. 머리로 느껴지는 지적 유희가 아니라 마음에서 생동하는 영혼의 즐거움 같았다.
그건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이 고루한 회색빛에서 총천연색의 화려한 컬러를 덧입는 느낌이다. 밋밋했던 2D 영화에서 갑자기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향기가 퍼지는 듯한 4D로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다. 생동감과 입체감이 살아나고 향기가 덧입혀지고, 달콤하거나 쓴맛이 나는 것 같은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 순간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많은 아름다움을 드디어 목격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의 내가 예술 작품을 보면서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이유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열쇠인 풍부한 감수성과 섬세한 감각이 모두 억눌리고 닫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작품을 보아도 무미건조한 회색빛으로 보였기 때문에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것이었다.
작품의 아름다움을 보다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 비법은 작품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차이보다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풍부하고 섬세한 감수성, 감각이 있는지 없는지 에 따른 차이가 훨씬 컸다. 또한 작품을 볼 때 `정답에 가까운 감상평`을 추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하고 개인적인 느낌, 감정, 감상을 진정으로 존중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에 따른 차이라 느꼈다.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되었던 또 다른 방법은 나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과거의 나는 세계의 명작이라 불리는 모든 작품에서 감정적인 울림을 받길 원했다. 아무것도 안 느껴지면 그건 내가 부족한 것이니 어떻게든 감상을 느껴보고자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건 나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각자 자신의 취향과 시야에 따라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지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는 거친 나뭇결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부드러운 나뭇결을 아름답다고 할 것이다. 예술 작품에 관해서도 누군가는 거친 붓 터치를 아름답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부드러운 붓 터치를 아름답다고 느낄 것이다. 이건 어떤 것이 나에게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가? 에 대한 자신의 취향일 뿐이었다. 취향이 다양하고 넓은 경우에는 다양한 기법의 붓 터치에서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어떤 작품은 유난히 마음을 사로잡고 끌리고 감정적인 울림을 주는 반면에 어떤 작품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서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건 내가 이상하거나 부족하거나 제대로 감상을 못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취향의 차이구나! 싶었다. 또한 시기에 따라서 나의 감정과 의식 상태가 변화무쌍하게 변하기 때문에 시기마다 감정적인 공명으로 끌리는 작품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고 좋아하는 것이구나! 싶었다.
예술 작품의 본질이 무엇일까?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예술 작품의 본질은 작가가 자신의 감정 에너지와 메시지를 작품에 생생하게 녹여내어 관객의 마음에 쌓인 비슷한 감정과 생각을 톡톡 건드리고 일깨워주는 것, 그래서 관객에게 감정적인 파동을 주며 관객이 자신의 마음을 섬세하게 느끼고 살펴보게 해주는 통로라고 생각한다.
관객은 작품을 보면서 억눌러왔던 감정이 대리만족 되거나 해소되는 것을 느낀다. 또한 그동안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여 자신 안에 가득 쌓여있는 생각의 파편을 정리할 기회를 얻는다. 관객은 작품을 보면서 자신만의 사색을 하게 된다. 그렇게 작가와 관객은 비슷한 감정 에너지가 공명하면서 마음이 연결되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작품을 통해 위로받고, 치유되고, 깊은 연결감을 느낀다. 그게 내가 체험하는 예술 작품의 본질이라 느꼈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을 보면서 아름다움 혹은 어떠한 감정적인 울림을 느끼는 데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활짝 열린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 느꼈다. 설명이 없어도 그저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강렬한 감정과 메시지가 관객의 마음으로 직관적으로 와 닿는 작품, 작가와 관객의 마음이 곧바로 연결되어서 감정적인 파동과 울림을 준다면 그게 아름다운 작품이고 좋은 작품이라 느꼈다.
나의 경험으로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풍부한 감수성과 세심한 감각을 회복하고 깨우는 것, 그리고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감상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나는 수많은 영혼들의 정수가 녹아든 예술 작품을 접할 감사한 기회가 많을 것이다. 이런 소중하고 감사한 기회를 최대한 만끽하고 풍성하게 누리기 위해서 섬세하고 풍부한 감각과 마음을 최대한 깨우고 보존하리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