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역사 수업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5~6학년의 주제는 튜더 시대와 1, 2차 세계대전입니다. 시간 순서상 튜더 시대를 먼저 배우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Year B의 알피는 5학년에 세계대전을 먼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알피의 학교는 학년이 시작되면 학부모와 교사의 전체 미팅을 엽니다. 한 학년에 한 반만 있는 작은 학교라 아이들은 그대로지만, 선생님은 바뀌므로 서로 얼굴을 익히고 궁금한 점을 묻는 자리입니다.
5학년 학부모 미팅에 나가 보니 고학년이 되면서 숙제가 생겼군요. 학교에서 나눠 주는 문제집을 일주일에 세 페이지씩 풀어 가면 됩니다. 하루가 아니라 한 주의 과제이며 한 주는 영어, 다음 주는 수학입니다. 답을 집에서 맞혀 올 필요는 없고 채점은 선생님이 하십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챙기는 습관을 길러 주기 위해 해당 페이지는 부모들에게는 따로 연락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직접 알려 줍니다.
공책을 학교에 놓고 다니니 아이들은 주로 손등에 페이지를 적어 옵니다. 그런데 항상 아이들마다 적어 온 페이지가 달라서 학부모 단톡방에 매주 페이지를 확인하는 글이 꼭 올라옵니다. 알피 부모의 초등학교 시절에도 이보다는 숙제가 많았던 것 같지만 알피에게는 이 정도도 매우 큰 일입니다. 숙제를 마치면 늘 "엄마 머리가 뜨거워"라고 하지요.
선생님의 공지와 안내(이 학교는 활동하기 편한 옷차림을 매우 강조합니다. 거의 매일 체육 활동이 있어 치마, 청바지, 구두나 샌들, 액세서리류는 모두 금지입니다. 교복은 따로 없지만 결국 반바지, 레깅스, 조거에 운동화가 교복이라 할 수 있겠네요)가 끝나면, 학부모들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보통은 영어, 수학, 외국어 수업에 대한 질문이 많지만, 이번에는 역사 과목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알피의 반에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한국, 홍콩, 중국, 말레이시아,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미국, 쿠바, 아랍에미리트, 이스라엘, 터키, 헝가리, 덴마크, 그리스 출신의 아이들이 골고루 있기 때문에 국가 간의 역사를 다루는 부분은 매우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세계대전이 주제라면 더욱 그렇지요. 이는 사실 지금의 상황과도 맞물리는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학교에서는 공문을 보내 아이들이 전쟁에 대해 너무 자극적인 내용을 접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학교에서 아이들 간의 대화 시에도 조심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혹시 이런 소식으로 마음이 너무 불안한 아이가 있다면 상담 선생님에게 연락해 달라는 부탁도 있었습니다.
수업에서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학부모들의 질문 공세가 펼쳐집니다. 선생님의 답변에 따르면 초등학교 수준에서 전쟁을 가르칠 때는 정치, 외교, 전투 등에 대한 묘사보다는 전쟁이 민간인, 특히 어린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맞춘다고 합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주요 도시들이 독일 공습에 노출될 것에 대비해 약 80만 명의 어린이들을 시골로 대피시킨 ‘피리 부는 사나이 작전(Operation Pied Piper)’이 주요 내용 중 하나입니다.
이 대규모 작전으로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기차에 태워 시골로 보내졌지만, 3,000여 명 정도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더 먼 곳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방독면과 부모의 이름,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들고 학교에 모여, 그 자리에서 피난지로 향했습니다. 부모와는 운이 좋아야 편지로 연락할 수 있었지요.
미리 대피 계획을 세우고 전국의 수백만 가정을 방문해 수용 가능성을 조사한 뒤 시행된 정책이었지만, 전시에 이 정도 인원의 아이들이 부모 없이 이동하여 위탁가정에 맡겨졌다 돌아오는 과정에 사건사고가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친절한 가정을 만나 좋은 대우를 받고 운 좋게 벽장 속의 신세계를 탐험하는 행운을 누린 아이들도 있었으나(예, 그 나니아 연대기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학대나 방임, 심지어 범죄의 피해자가 된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스티브 맥퀸 감독의 2024년 영화 <블리츠>가 이 시기의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도 이 대피 정책이 등장합니다.
알피는 아직 5학년을 마치지 않아 공책이 학교에 있으므로 수업 내용을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동안 학교에서 방독면 만들기, 배급식량 체험하기, 당시 어린이들의 복장으로 등교하기 같은 활동들을 했고 2시간 정도 거리의 블레츨리 파크에 체험학습을 다녀왔습니다. 이곳도 시간이 부족해 다 둘러보지 못했다고 해서 가족과 함께 다시 방문했지요.
이 주제 역시 학부모 일일교사 제안이 있었습니다. 소싯적에 전쟁 무기들에 대한 논문을 쓴 적이 있는 알피의 아빠가 드디어 내 차례인가 하고 자신만만하게 신청서를 냈으나, 전쟁 당시 저지섬의 수용소에서 태어나신 할머니의 등장에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요(물론 결과적으로 두 명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긴 했습니다).
튜더 시대는 본격적으로는 다음 학년에 다루게 될 듯한데, 얼마 전 튜더 시대 인물들과 생활상을 주제로 한 공동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좀 의아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이 시대는 영국사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고,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부분들이 많아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한 측면이 있습니다. 정보가 더 이상은 없으니 학년 말에 공책을 가져오면 다시 살펴봐야겠습니다.
5학년 후반으로 가고 있는 이제까지의 관찰에 따르면, 일단 학교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역사 교육의 목표(History Intent Statement)에 따라 수업이 충실히 이루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학교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저학년에서는 아이들이 역사에 흥미를 갖고 더 알고 싶어 하도록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목표라면, 고학년에서는 역사를 통해 통찰력 있는 질문을 던지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증거를 평가하고, 논점을 가려내며, 관점과 판단력을 기르는 것이 목표입니다.
여기에 ‘주어진 자료 안에서’라는 단서가 붙는데, 이는 GCSE 시험 평가 항목에서도 강조되는 부분입니다. 불확실한 자료나 개인의 상상력보다는 주어진 자료 안에서 증거에 기반해 논리를 구성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역사 교육의 중요한 목적인 것이지요. 세계사의 큰 흐름이나 유명 인물, 사건, 연대 등을 많이 외우는 것보다 이 능력이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이러한 방식은 물론 장단점을 동시에 가집니다. 가장 큰 단점은 세계사의 다양한 측면을 접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는 중등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작년에 지역 5개 중학교를 방문해 커리큘럼을 확인해 본 결과, 유럽사와 직접 관련 없는 타 지역 역사가 포함된 학교는 한 곳뿐이었고, 그나마도 인도의 무굴 제국 정도에 그쳤습니다. 동아시아사는 아예 다루지 않습니다.
한국의 학생들이 유럽사를 비롯한 세계사를 매우 자세히 배우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지요. 왜 동아시아사가 없느냐는 질문에 담당 교사들은 대부분 본인의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며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실질적인 개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습니다. 영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매우 확고한 알피가 균형 잡힌 역사관을 갖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가정에서의 노력이 더욱 필요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