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야만인, 그 문화적 상징 뒤 청년 마이를 만나다
아래 그림 속 이국적 배경에 남태평양 지역의 전통 의상을 입고 맨발로 서 있는 잘생긴 청년의 이름은 마이(Mai)입니다. 영국 땅을 밟은 최초의 폴리네시아인이죠. 이 거대한(236 ×140cm) 전신 초상화는 18세기 최고 초상화 화가 중 하나였던 조슈아 레이놀즈 경의 작품으로 영국 국립 초상화 박물관(National Portrait Gallery, 이후 NPC로 표기)의 큐레이터 루시 펠츠 박사에 따르면 영국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초상화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펠츠 박사는 이 그림이 품위와 위엄, 그리고 주체성을 담아 그려진 최초의 유색인종 초상화라고 설명합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초상화 하나 정도는 갖고 있던 시절이었으나 이 정도 크기에 달하는 전신 초상화는 꽤 높은 신분이 아니면 제작하기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18세기 유럽인들에게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아폴로 벨베데레(Apollo Belvedere)를 연상케 하는 포즈에 서양식 의복이 아닌 타히티 귀족과 사제 계급의 의례복인 타파(Tapa)를 입고 당시 유럽에서는 금기시되었던 문신이 선명하게 새겨진 손을 앞으로 당당히 뻗고 있는 마이의 모습은 NPG에 함께 전시된 어느 귀족 자제의 초상과 비교해 보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고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1776년 왕립 예술원(Royal Academy) 전시에 출품되어 큰 찬사를 받은 후 비교적 최근까지도 한 귀족 가문의 소장품으로 전해져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세상에 처음 나온 2001년, 소더비 경매에서 이 작품을 구매한 아일랜드 사업가 존 매니어가 재판매를 결정하자 영국 정부는 이 소중한 영국의 문화유산이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우려하여 수출 유예 조치를 내리게 됩니다.
이 조치가 세 번이나 연장되는 동안 작품의 가격으로 책정된 5천만 파운드(약 950억 원)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NPG는 대규모의 기금 모금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국립 문화유산기념기금(National Heritage Memorial Fund, NHMF)의 만 파운드, 아트 펀드(Art Fund)의 250만 파운드(역사상 최대 규모)의 보조금을 비롯하여 여타 여러 재단과 일반 대중의 기부로 2천5백만 파운드를 모으는 데 성공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2023년 4월, NPG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게티 미술관(J. Paul Getty Museum) 간의 “혁신적이고 이례적인 파트너십”을 통해 극적으로 해결되었는데 세 번째 수출 유예 조치 연장 기간을 2달밖에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이 계약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백만 파운드 정도가 여전히 부족해서 이 금액을 채우기 위해 기부를 호소하는 기사가 언론에 계속 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공동 소유 계약에 따라 두 박물관은 이 그림을 공동으로 인수하고 소유권을 공유하며, 런던과 로스앤젤레스에서 번갈아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했던 의지가 절반의 성공을 이룬 셈이지요. 이 그림은 약 5년 주기로 순환 전시하기로 합의되었고 일단 2023년 6월 NPG의 대규모 재개관 시점에 맞춰 대중에 공개되었습니다. 2028년 로스앤젤레스 하계 올림픽 기간에 맞춰 미국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이 과정은 영국 언론을 통해 계속 보도되었고 많은 이들의 초조한 기다림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2년 전 여름, 영국 역사의 중요한 인물들의 초상이 가득한 NPG의 한복판에서 이 작품의 실물을 처음 보았을 때의 복잡 미묘한 느낌은 아직도 강렬합니다. 그 중요성을 증명하듯 긴 회랑의 가장 끝 전시관 중앙에 당당히 자리 잡은 그의 모습은 친근하면서도 낯설었으며 자연스러우면서도 어색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케임브리지의 피츠윌리엄 박물관(The Fitzwilliam Museum)에서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동네에 방문한 셀럽을 친견한 기념으로 그림의 주인공인 마이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마이는 종종 타히티 출신으로 오해를 받곤 하지만 실제로는 1753년경에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라이아테아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왕족까지는 아니어도 지주의 아들이었던 그의 어린 시절은 격렬한 지역 분쟁으로 점철되었는데 마이가 열 살쯤 되었을 때, 라이아테아 섬은 이웃 섬인 보라보라 섬의 전사들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투 중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고 남은 가족은 타히티로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이는 타이티에 머무는 동안 마침 그곳에 정박했던 제임스 쿡 선장의 일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쿡이 두 번째 항해 후 태평양을 떠날 때 그는 퍼노 선장의 HMS 어드벤처 호에 함께 탑승하여 1774년 7월 영국의 스핏헤드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생년월일이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당시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영국에 도착한 그는 런던으로 이동하여 쿡의 첫 번째 태평양 항해에 동행한 바 있는 저명한 자연주의자이자 식물학자인 조셉 뱅크스 경의 집에 머물렀는데 뱅크스가 마이의 후견인 역할을 맡아 생계 유지비와 다양한 사교 활동을 지원한 덕에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닌 상류층으로의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마이는 런던에서 체류하는 동안 영국 사교계에서 상당한 유명인이 되었고, 왕족들을 비롯한 상류 사회의 엘리트들과 광범위하게 교류했습니다. 그의 차분한 태도, 편안한 매력, 흠잡을 데 없는 매너는 가는 곳마다 호스트들로부터 늘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이의 사교적 성공의 비결은 그의 캐릭터가 당시의 계몽주의 작가와 예술가들이 상상했던 "고귀한 야만인"의 개념에 완벽히 부합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고향에서부터 이미 가부장적 계급 사회의 문화에 익숙했던 이 영리한 청년은 긴 항해 기간 동안 영국의 사회 구조에 대해 배우고 예의범절을 습득했으며 준수한 외모와 특유의 우아한 태도로 본토 사교계에서도 크게 환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등과 손에 선명히 새겨진 정교한 문신은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이 문신은 폴리네시아에서는 성인의 증표였습니다. 당시 런던에서 문신은 범죄자의 이미지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의 고향 문화에서 계급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성숙함을 표현하는 의미였던 마이의 문신은 오히려 그에게 신비로운 힘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서양식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선천적으로 부여된 도덕성과 품위를 소유하고 있었고 뛰어난 사냥꾼이었으나 자연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마이는 어부의 낚싯바늘에 미끼로 꿰어진 벌레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고 그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잡은 물고기는 절대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며 마주친 빈곤층의 비참한 삶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거지들을 매우 불쌍히 여겼다고 합니다.
이 강인하면서도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이며 자연을 사랑하고 타고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데다 이국적 품위에 유럽식 매너를 완벽히 장착한 청년은 유럽 지식인들의 막연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이상을 완벽히 충족시켰습니다. 그러나 많은 스타들이 그렇듯이 그가 그들과 함께 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지 불과 2년 후인 1776년, 마이는 영국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뒤로하고 쿡 선장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항해에 동승하여 귀국길에 오르게 됩니다.
아쉽게도 고향에 돌아간 후 그의 행적은 기록에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쿡 선장은 1777년 후아히네 섬에 상륙하여 마이를 위해 유럽식 집을 짓고 약간의 무기와 생필품, 유럽에서 가져온 악기와 장난감 병정 등의 기념품들, 원숭이와 말을 비롯한 가축들을 주고 그의 정착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1788년 10월부터 6개월간 타이티에 머물렀던 윌리엄 블라이 중위가 현지인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쿡이 떠난 후 약 30개월 후 자연사(아마도 병일 것으로 추정)하였고 쿡이 지어준 유럽식 집과 그의 물건들은 약탈당하고 산산이 부서졌으며 원숭이는 코코넛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가축 중에는 암말 한 마리만 남았다고 합니다. 블라이는 이 소식에 매우 분노하고 실망했습니다. 실로 허무한 결말이 아닐 수 없지요.
여기까지가 문서로 남아 전해진 마이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 완벽한 '고귀한 야만인'은 대체 왜 애초에 영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을까요? 영국의 사교계에 화려하게 데뷔하고 싶어서는 물론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면 먼 이국 땅에서 살아 있는 문화적 상징물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냈던 이 폴리네시안 청년의 머릿속에는 대체 어떤 생각들이 들어 있었던 것일까요?
NPC에서 만난 마이는 이 의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NPC가 묻지 않았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2025년 가을, 이 역사적 인물을 정중히 맞이한 피츠윌리엄 박물관은 그 답을 듣고자 했습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