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ortrait of Mai(2)

고귀한 야만인, 그 문화적 상징 뒤 청년 마이를 만나다

by Alfius Historographus

고귀한 야만인, 그 문화적 상징 뒤 청년 마이를 만나다

Tau o Mai | Journeys with Mai

The Fitzwilliam Museum

17 October 2025 – 8 February 2026


(앞의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자, 그러면 겨우 스무 살 남짓의 폴리네시안 청년이었던 마이는 왜 영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던 걸까요? 여기서는 역사학자 햄튼 사이드가 재구성한 이야기를 따라가며 마이의 전략적 목표와 감춰졌던 열망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마이가 고향 라이아테아 섬을 떠나 타히티에 머물던 1767년, 타이티에 상륙한 영국의 사무엘 월리스 대령은 이 섬은 이제 조지 3세의 소유이며 영국의 영토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일방적이고 황당한 주장에 당연하게도 적대적 반응이 이어지자 월리스는 군중이 모인 곶을 향해 대포를 발사했고, 많은 사람이 탄약 조각과 파편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었던 마이의 옆구리에도 금속 조각이 스쳐 날카로운 상처와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겼습니다. 영국과 타히티의 첫 만남의 흔적이 그의 몸에 새겨진 셈이었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대포의 엄청난 위력이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십 대 소년 마이는 영국의 강력한 무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의 고향을 공격하여 아버지를 죽인 무리들(보라보라인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강렬한 환상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1773년 쿡 선장이 두 번째 태평양 항해 중 타히티에 도착했을 때, 20세 전후의 청년으로 성장한 마이는 HMS 어드벤처호 선장 토비아스 퍼노를 만날 기회를 얻은 후 자신을 영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퍼노는 그와 함께 가기로 결정했고 마이는 선원 자격으로 배에 올랐습니다.


배로 여행하는 동안 마이는 영어를 조금 배웠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오마이(Omai)’ 혹은 ‘오미아(Omiah)’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O"는 타히티어로 "여기 있다" 또는 "이것이 있다"는 뜻으로 이름의 일부가 아니었으나 이 잘못된 명칭은 이후로도 꽤 오래 가게 되어 이후 여러 기록에서 마이는 오마이로 표기되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1774년 7월 14일, 어드벤처호가 영국에 도착한 후 퍼노는 마이를 당대의 명사이자 과학자였던 뱅크스 경에게 소개했고 그는 마이를 런던에 있는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국왕 조지 3세를 만나는 것이었고, 뱅크스는 마이를 대신하여 왕실에 알현 신청을 했습니다. 그의 요청은 이례적으로 즉시 수락되었고, 뱅크스는 급히 재단사를 불러 마이의 치수를 재고 예복을 만들게 했습니다.


마침내 조지 3세를 알현하는 날, 마이는 맨체스터산 적갈색 벨벳으로 만든 새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고 예법에 따라 제법 그럴듯하게 절을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긴장한 나머지 문신이 새겨진 손으로 불쑥 왕의 팔을 잡고 “안녕하십니까? 토시(조지) 국왕 전하(How do, King Tosh!)”라고 인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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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이 무례를 탓하지 않고 그에게 준비한 칼을 건네주자 평정심을 되찾은 마이는 서툰 영어로 준비한 말을 시작했습니다. “전하, 당신은 영국의 왕이시며 타히티의 왕이십니다. 저는 전하의 신하입니다. 저는 우리의 적, 보라보라인들을 물리칠 화약을 구하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물론 조지 3세는 프랑스나 스페인 등 다른 라이벌 국가들도 이 아름다운 군도에 야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타히티와 그 주변 섬들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이가 원하는 것처럼 섬 부족들 간의 갈등에 제국을 휘말리게 할 생각은 없었던 왕은 확답을 주지 않은 채 다음 원정이 시작되는 대로 그를 남태평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비록 원하는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마이에게 보여준 국왕의 호의적인 태도는 그 자신의 매력과 결합하여 그를 순식간에 런던 사교계의 중심인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탐험하여 발견한 지역의 사람들을 본국으로 데려와 교육을 시키고 관찰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이는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지속되던 전통이었습니다. 1616년 영국을 방문하여 널리 환대를 받았던, 지금의 버지니아 출신의 포와탄족 여성 포카혼타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죠. 그러니 쿡 선장의 항해에도 참가한 바 있고 폴리네시아 지역에 관심이 많았던 당대의 명사 뱅크스가 기꺼이 마이의 후원자가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성공적인 사교계 생활에 대하여는 앞 글에서도 다루었으니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가 주변인들에게 '마나(mana)'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마나는 일종의 특별한 힘을 의미하는데 특히 강한 무력을 상징합니다. 영어와 유럽식 예절, 댄스와 승마를 배우고 화려한 생활을 즐기는 가운데서도 그는 늘 '마나'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동족들을 노예로 삼은 적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땅을 되찾는 날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1776년 7월 12일, 마침내 그가 영국을 떠나 고향으로 향할 때, 그토록 원했던 영국의 '마나'는 그와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영국 정부는 마이가 폴리네시아에서 유럽의 앞선 문명을 전파하고 관계를 개선해 주는 역할을 해 주길 원했기에, 그를 타히티에서 서쪽으로 약 190km 떨어진 후아히네 섬에 정착시키고 그가 자신의 집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정도의 무기만 제공했습니다.


영국의 사교계에서 막 돌아온 그는 현지인들과 잘 어울릴 수 없었는데, 아마도 과장된 우월감과 영국에서 가져온 기이한 물건들로 인해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와 발전된 문명을 자랑하던 영국은 현지에서는 쓸모없는 기념품에 불과한 장난감들과 함께 그를 돌려보냈고, 이는 마이를 혼란스럽고 뿌리째 뽑힌 존재로 몰아넣었습니다. 결국 영국 정부도, 마이도 목적을 온전히 달성하지 못했던 셈이지요.


피츠윌리엄 박물관의 순회 전시는 마이의 이루지 못한 꿈을 타히티와 아오테아로아 뉴질랜드(Aotearoa New Zealand) 출신 예술가들로 구성된 사바제 클럽(SaVĀge K'lub)과 함께 실현하려 합니다. 이 단체의 이름은 19세기에 설립되어 오늘날까지 20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런던의 젠틀맨 클럽인 더 새비지 클럽(The Savage Club)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따서 만든 것입니다.


마이의 초상화가 전시된 방에는 피츠윌리엄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폴리네시아 유물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마이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으로 붙들려 와 이국 땅에서 포로처럼 잡혀 있던 유물들은 이 공간에서 마이와 현대 폴리네시아 아티스트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들을 대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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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에서 18세기 영국 사교계의 모임에서처럼 당시 유명인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이상을 대변하던 마이는, 이곳 피츠윌리엄에서는 그의 고향에서 온 창과 무기들, 즉 고향의 ‘마나’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의 초상 맞은편에는 여전히 그 땅을 지키며 자신들의 뿌리를 보존하고자 노력하는 후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그와 눈을 맞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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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국의 ‘마나’를 부족 간의 싸움에 이용하려 했던 마이는 후대인들에게 민족의 반역자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역사 속 인물이 그렇듯이 마이 역시 자신의 시대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외세를 끌어들여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그의 전략은 분명 한계를 지닌 접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바제 클럽의 아티스트들은 마이를 외세에 이용당하다 힘없이 스러진 한 가련한 젊은이가 아니라, 전통의 마나를 부여받은 당당한 전사이자 사제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그의 주변에 놓여 있는 무기들과 유물들은 이 공간에서 그와 함께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습니다.


그의 고향에서는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던 한 젊은이를 역사의 희생물로 여기지 않고, 그가 원했던 진정한 마나를 갖춘 전사로 재탄생시키는 예술의 힘은 강력하고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들의 메시지를 통해 마이의 이야기는 영국 역사의 닫힌 장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폴리네시아 서사의 일부로 다시 조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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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서 이를 뉴질랜드 빅토리아 웰링턴 대학의 피터 브런트 교수가 설명하는 NPG에서 만난 마이와 비교해 봅시다.


“국립 초상화 미술관(NPG)의 마이 초상화를 보았을 때 마치 르네상스 그림의 소실점처럼 긴 복도 끝 붉은 벽 중앙에 멋지게 설치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양쪽으로 작은 갤러리들을 지나갔는데, 그곳에는 근대 영국의 정치 및 문화 아이콘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마지막 갤러리에서 마이는 18세기 영국의 주요 인물들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중에는 그의 후원자 조지프 뱅크스(Joseph Banks), 1760년대에 영국의 식민지 문제를 담당했던 총리 존 스튜어트(John Stuart)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이를 한동안 바라보고 나니, 문득 ‘저 사람은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브런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NPG에서 18세기 영국의 명사들과 함께 한 마이는 가장 주목받는 자리에 있었으나, 결국 그 시대 영국 사회에서 그가 처했던 주변부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값비싼 장식품 같았던 그의 모습은, 이곳 피츠윌리엄 박물관에서는 후손들의 환대와 그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유민처럼 떠돌던 고향의 유물들과 함께 제자리를 찾습니다.


사바제 클럽은 과거의 마이를 끌어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이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보여주려 합니다. 마이의 초상화 바로 옆에는 2019년 뉴질랜드 정부가 쿡 선장의 탐험대가 뉴질랜드 동부 해안에 처음 상륙하여 마오리(Māori)와 처음으로 만난 날을 기념한 행사인 Tuia 250를 비판하고 쿡이 살해당한 2월 24일을 원주민들의 새로운 기념일로 만들자는 내용을 담은 팸플릿이 벽을 빽빽이 채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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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의 초상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과연 "사회가 쿡의 삶을 기념하는 것은 곧 우리 원주민들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과 같다. 사회가 우리 민족의 죽음을 기념할 수 있다면, 분명 우리도 쿡의 죽음을 기념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이 도발적인 메시지를 대대로 영제국의 통치자들을 배출해 온 영국의 허파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당당히 전시할 수 있었을까요?


과거의 마이는 무력했지만 현재의 마이는 그의 후손들이 그들의 주체적 목소리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인 이 방은 단순한 미술 전시 공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서로를 이해하고 아픔을 껴안으며 새로운 앞날을 만들어 가는 힘을 나누는 곳입니다.


식민지를 겪었던 나라의 국민인 그리고 오랫동안 외국에 나와 살고 있는 이민자인 제게도 그들의 메시지는 강력하게 다가왔습니다. 2년 전 NPG에서 만났던 마이에게서는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였지요. 과거의 탐구를 통해 미래를 설계하는 대학 박물관이 시도할 법한 신선하고 패기 있는 전시라고 생각합니다.


마이의 초상화는 내년 4월까지 피츠윌리엄에 머물다 브리스톨로,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의 게티 박물관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마이는 또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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