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이란 무엇인가?(3)

『Noblesse Oblige』 와 "Outrageous"(2)

by Alfius Historographus

『Noblesse Oblige』 와 "Outrageous"(2)


유니티는 히틀러를 만나고 싶은 열망에 독일 유학을 자청합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뮌헨행을 강행한 유니티는 히틀러가 자주 들른다는 레스토랑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여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히틀러를 대면하게 된 유니티는 점차 그의 호감을 얻고 사적 친분을 쌓게 됩니다. 유니티는 히틀러에게 거의 종교적 숭배에 가까운 충성심을 보였고,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까지 했습니다.


공개적으로 나치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유니티는 영국의 언론들로부터 주목받았고 1935년 9월 11일 데일리 미러지의 1면에는 "귀족의 딸이 나치의 귀빈이 되다"라는 제목과 함께 유니티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히틀러는 유니티에게 직접 뮌헨의 아파트를 선물하기도 했는데 아파트를 보러 간 유니티가 흥분하여 인테리어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재산을 빼앗긴 유대인 부부는 부엌에서 흐느끼고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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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유니티가 나치와 파시즘에 경도되어 있는 동안 세 살 아래 동생 제시카는 완전히 반대의 사상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붉은 양"이라 불릴 정도로 가족 내 좌파 노선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제시카는 이미 열두 살 때부터 도주 계좌(Running Away Account)를 만들어 이 특권적인 집안으로부터의 탈출을 계획했습니다. 드라마에서도 제시카의 방에서는 동전과 지폐로 가득 찬 큰 유리병이 자주 보입니다. 어린 시절 같은 방을 썼던 두 자매는 각자 자신의 벽면을 각각 나치와 사회주의 선전물로 도배했다고 하지요.


1937년 데뷔탕트를 갓 치른 19세의 제시카 미트포드는 처칠의 조카인 에스먼드 로밀리와 비밀리에 결혼하고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여 공화파를 지지하기 위해 야반도주를 감행합니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후 십 대의 어린 부부는 런던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였던 이스트 앤드 지역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그 해 12월 아기를 낳았으나 겨우 6개월 만에 어린 딸 데카를 병으로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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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가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사는 동안 역시 만만치 않은 다이애나는 사귀고 있던 모슬리와 두 번째 결혼을 감행하는데 결혼식은 독일의 괴벨스 저택에서 비공개로 진행되었습니다. 무려 히틀러가 증인으로 참석한 비밀 결혼식의 배후에는 아마도 유니티의 영향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앞서 언급한 풍자 소설로 이미 다이애나와 갈등을 빚었던 낸시는 이 결혼식 이후 다이애나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었고 심지어 1940년에는 동생을 직접 고발하기까지 합니다. 낸시는 다이애나의 여권을 몰래 훔쳐보고 몇 번이나 독일을 방문했는지를 조사한 후 영국의 안위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니 당장 구금할 것을 당국에 촉구하는 편지를 썼고 이를 알게 된 다이애나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결국 전쟁 발발 후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던 다이애나는 얼마 후 풀려나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가 전쟁 후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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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후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 지도자들과는 달리 다이애나와 모슬리 부부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에드워드 8세와 심슨 부인 등 명사들과 교류하며 편안한 여생을 보냈는데 2003년 93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할 때까지 별다른 후회의 기색이 없었고 종종 언론에 등장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유니티는 자매들 중 가장 일찍 극단적인 최후를 맞았는데 1939년 독일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자 자신의 머리에 직접 총을 쏘아 자살을 기도합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지고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로 영국에 돌아왔으나 결국 몇 년 후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습니다.


당시의 기사에 따르면 유니티는 고향에 돌아와서 기쁘냐는 질문에 "비록 당신들의 편은 아니지만, 영국에 돌아와서 정말 기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유명했던 히틀러와의 친분 관계에도 불과하고 유니티 역시 언니와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한편, 1941년, 2차 대전에 참전 중이던 로밀리가 전사하자 슬픔에 빠져 지내던 제시카는 2년 후, 유대계 미국인 변호사 로버트 트로이하프트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미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펼쳤습니다.


낸시의 'U와 Non-U'가 화제가 되자 이에 아이디어를 얻은 제시카는 동지들이 사용했던 상투적인 표현들을 조롱하며 'L과 Non-L'(좌파와 비좌파)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자신의 입장에서 쓴 회고록 『귀족과 반역자들(Hons and rebels)』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부부는 공산당을 탈당했으나 제시카는 평생 사회 운동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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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두 자매 파멜라와 데보라의 삶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둘째 파멜라는 1936년 백만장자로 유명한 물리학자였던 데렉 잭슨과 결혼했다가 1951년 이혼한 후에는 여성 승마 선수 토마시와 함께 시골에서 농장을 돌보고 요리를 하며 조용히 지냈습니다.


닭들을 키우며 런던의 사교계와 거리를 둔 삶을 사는 파멜라를 자매들은 "Woman"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으나 손수 자동차를 운전하여 유럽 대륙을 여행하는 등 사실 당대의 전형적인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역시 다른 자매들처럼 누구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 태생적인 ‘Hon'이었는데 어느 모임에서 인도 총독을 지낸 마운트배튼 경이 그의 별명에 대해 묻자, "실례지만 당신은 누구시죠?"라고 되물어 상대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지요.


막내 데보라는 기 센 언니들에게 묻혀 조용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자매들 중 가장 전형적인 귀족의 삶을 살았습니다. 1941년 공작가의 차남 앤드류 캐번디쉬와 결혼했으나 9년 후 후계자였던 남편의 형이 갑자기 사망하자 데번셔 공작부인으로 승격했고 유명한 채트워스 하우스(영화 오만과 편견의 촬영 장소)의 안주인이 되었습니다.


데보라 결혼.jpg 데보라의 결혼사진


40년대 후반부터 크게 바뀐 상속세 정책으로 공작가도 재정적 위기에 봉착하였지만 부부는 50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으로 297개의 방과 35,000 에이커의 부지를 가진 이 거대한 저택을 매년 6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관광 명소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데보라는 60대에 들어서 뒤늦게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10권이 넘는 책을 남긴 부지런한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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