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교양의 기원으로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의 학문 분류에 따르면 리버럴 아츠는 자연학과 인문학으로 나눌 수 있겠지요. 자연학에서 발전한 자연과학이 인류에게 어떤 이득을 주었는지는 어린아이도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더 길고, 더 편리하며, 더 쾌적한 삶을 선사했지요.
그렇다면 인문학은요? 고대로부터 끈질기게 이어져 왔지만, 인류가 인문학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답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답을 내놓더라도 모두의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나 오늘은 그중 한 가지, 비교적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글에서 자연법칙과 역사의 관계를 잠시 다루었습니다. 자연은 세상 만물의 본성과 본능에 따라 움직입니다. 물질 고유의 특성들이 공존하고 상호작용하며 여러 법칙을 만들어 내고, 그 법칙에 따라 예측 가능하게 흘러갑니다.
여기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의도를 가진 인위적인 변화가 개입하지 않습니다. 자연에 그 인위적인 변화를 가져온 존재가 바로 인간이며, 인류의 역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러한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서 변화를 만들어 온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우리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준 한 사건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고자 합니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엡스타인 파일의 내용이 공개되자, 많은 이들이 충격과 공포, 실망과 좌절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인간 본성이란 원래 그런 것”, “역사적으로 이런 사건은 수두룩했다”라는 냉소적인 목소리도 적지 않게 들려옵니다. 권력의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체념 섞인 말들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일정 부분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대의 기괴한 종교의식이나 원형극장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는 이 시대 곳곳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BBC는 1990년대 초 보스니아 전쟁 당시 일부 외국인들이 사라예보 포위전 중 ‘스나이퍼 사파리(sniper safaris)’에 참여했다는 혐의에 대해 이탈리아 밀라노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고 보도했습니다. 1992년부터 약 4년간 세르비아군에 포위되어 11,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그 비극의 현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의혹은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에치오 가바체니(Ezio Gavazzeni)가 제기했습니다. 그는 부유한 외국인들이 거액을 지불하고 세르비아군 진지에서 민간인을 저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남성, 여성, 어린이를 표적으로 삼을 때 각각 다른‘요금'이 책정되었다고 합니다.
가바체니가 제출한 자료에는 보스니아군 정보장교의 증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보스니아 측은 1993년 말 이른바 ‘사파리’ 의혹을 인지하고, 1994년 초 이탈리아 군사정보기관(SISMI)에 관련 정보를 전달했으며, 그 결과 몇 달 안에 해당 활동이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2022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사라예보 사파리(Sarajevo Safari)'를 계기로 추가 조사를 진행했고 전 사라예보 시장의 보고서를 포함한 17쪽 분량의 자료를 검찰에 제출했습니다. 가바체니는 관련자가 최소 100명 이상이며 일부는 현재 가치로 최대 10만 유로를 지불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 의혹을 곧바로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이릅니다. 보스니아 현지 수사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고, 당시 사라예보에 주둔했던 영국군 관계자들은 그 '사파리'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으며 검문소 등 현실적인 여건상 실행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이를 도시 전설로 일축했습니다. 아직 결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생명에 대한 존중 없이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상황은 스티븐 킹의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벌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본래 악하게 태어났을지도 모르고, 권력을 가진 자는 그것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자 속성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봐라, 역사는 결국 반복된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춘다면 그것은 인문학을 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역사가가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하면 더 생생하고 흥미롭게 묘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거기에 그친다면 저는 훌륭한 이야기꾼일 수는 있어도 결코 좋은 역사가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뛰어난 묘사력은 훌륭한 작가에게 중요한 도구이지만, 그것만으로 위대한 문학이 탄생하지는 않습니다. 작품에는 반드시 작가 자신의 ‘사유'가 담겨야 합니다.
여기서 다시 처음의 논의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문학은 결국 자연의 법칙에 인위적으로 맞서 변화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입니다. 그렇다면 그 변화는 어디를 향해야 할까요?
교양이든 학문이든, 인문학의 출발점은 분명합니다. 바로 ‘나’를 넘어 '타자(他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입니다. 제가 앞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했듯이 타자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해하기 위함이며 이해는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존을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안전’입니다. 자연이 부여한 유한한 삶을 가능한 한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때로 타고난 본성과 본능을 제한하는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서가 묘사하는 낙원은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어울리고,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쳐도 해를 입지 않는 곳입니다. 이는 실제 자연 상태의 사자와 어린양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자의 본능을 타고났거나 사자와 같은 힘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 본능대로 살지 않고 함께 어우러지는 상태, 상대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이 바로 낙원입니다.
이는 인류가 자연 상태를 벗어나 역사를 이루어 온 이래, 모든 종교와 철학, 문학이 꿈꿔 온 궁극적인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는 단 한 번도 저절로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인류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공격적인 본능을 억누르고,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갈아내며 공존의 가치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더구나 인간 사회에서 권력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사자의 힘이 아닙니다. 어디선가 “내가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았으니 그들을 판단할 수 없듯, 권력을 가져 보지 못했으니 권력자를 판단할 수 없다”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등치된 소수자와 권력자는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 사회의 모든 권력은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에 의해 부여됩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투표로 선출된 공직자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권력은 사회의 안녕과 구성원의 안전한 삶을 위해 위임된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며 발전해 왔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본능과 싸우며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해 온 과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제도와 사회 속에서 발생한 권력은 어떠하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기에, 마땅히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지점이 드러납니다. “원래 그런 것”이라는 체념적 냉소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엡스타인 파일이나 스나이퍼 사파리와 같은 사건 앞에서 우리는 쉽게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라는 체념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인간의 본성이나 권력의 속성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선택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거대한 시스템을 단숨에 바꾸어 내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끔찍한 비극 앞에서 무뎌지기를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왜 중요한지를 스스로에게 끝까지 되묻는 개인으로 남을 수는 있습니다.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에 쉽게 기대지 않으려는 노력, 그리고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 감정을 서둘러 지워 버리지 않으려는 태도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본능에 맞서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해 온 오랜 역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안전한 사회’는 구호나 외침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내면에서 존엄성의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는 조용한 사유 속에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유의 힘을 기르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오래된 학문을 지금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