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아이가 읽고 있는 '반지의 제왕' 확장판을 동네 영화관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표를 샀습니다. 이 영화를 무려 23년 만에 아이와 함께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4시간에 걸쳐 아이가 해리 포터 이야기와 겹치는 클리셰 찾기에 몰두하는 동안 저대로 잠시 빠져든 딴생각이 잔상으로 남아 글로 정리해 공유해 보려 합니다. 바로 전에 올린 '안전의 인문학' 과도 연결되는 내용일 수 있겠습니다.
미리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이 글에는 스포가 가득하니 아직 반지의 제왕을 읽거나 보지 않은 분들은 먼저 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악은 이토록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데,
선은 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어느 드라마의 대사라는 이 문장은 소셜 미디어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골 주제입니다. 문제의 드라마는 보지 못했지만,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듯하니 오늘은 이 문장을 출발점으로 삼아 보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벽돌책을 시리즈로 엮어도 부족할 만큼 방대한 철학적, 종교적 논의가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단면을 세로로 잘라 관찰해 보는 행위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인문학이 자연 상태에 대한 저항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했지만 당연히도 자연 그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의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자연 세계가 유지되는 원동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가 그 수준을 넘어 과도하게 추구될 때, 그것은 흔히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소유욕, 권력욕, 성욕, 과시욕 등이 지나칠 경우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는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처럼 악이 본능적 욕구에서 비롯한다면 앞의 문장에서 "악은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는 구절은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능에는 본래 고민이 없습니다. 어떤 행위를 할 때마다 매번 ‘왜 해야 하는가?'를 따져 묻는다면, 그것을 본능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선이란 무엇일까요? 앞선 글에서 저는 인문학의 핵심 주제를 '방향에 대한 고민'으로 설명했습니다. 넓게 보면 선 또한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인문학과 마찬가지로 선 역시 '타자(他者)'에 관련한 개념입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생명체라면, 선과 악이라는 구분 자체도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선은 자신의 (당연한) 욕망을 타자를 위해 제한하는 행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이며, 필연적으로 고민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욕망을,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제한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포기한다면 인류는 이미 오래전에 멸종되었을 테니까요.
더구나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공동체적 규범으로서의 선이라면 그 제한의 방식과 정도에 대해 일정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며 그 적합성은 지속적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어제 한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군대와 관련된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의 게시물을 보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문구가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If someone can enjoy marching to music in rank and file,
I can feel only contempt for him; he has received his large brain by mistake, a spinal cord would have been enough.
짐작하셨겠지만 여기서 음악에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이들은 군인들입니다. 군인들에게는 생각할 수 수 있는 뇌가 필요없고 오직 반사신경에 따라 움직이는 척수면 충분하다는 비아냥 섞인 지적이지요. 이러한 말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은 모두 아실 테니 굳이 더 말을 보태지 않겠습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조직 가운데 명령 체계가 가장 분명한 조직이 군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군인은 스스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존재입니까? 군인에게는 원래 선도 악도 없는 것일까요?
소설『반지의 제왕』에서 톨킨은 절대악을 군대의 모습으로 형상화합니다. 악의 화신 사우론이 길러낸 오르크 군대는 생각도, 부모도, 가족도 없습니다. 그들은 땅속에 묻혀 있다가 튀어나와 사우론의 명령에 복종해 싸우는 전쟁 기계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욕망은 존재하여 물욕과 권력욕은 강하지만 전우애 같은 것은 애당초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에 맞서 싸우는 인간계의 군대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싸우고 싶은 욕망이나 기계적인 명령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전쟁은 가족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 이유를 받아들일 때 군인들은 비로소 무장하고 기꺼이 전장으로 나갑니다. 출정식 장면에서 인간 군대와 오르크 군대는 확연히 대비됩니다.
인간 군대의 출정식에 마중 나온 가족들의 눈에는 걱정과 두려움, 슬픔이 역력합니다. 아이들은 꽃을 꺾어 군인들이 지나갈 길에 뿌립니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향하는 이들에 대한 예우입니다. 반면 절대악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도구인 오르크 군대는 느린 발걸음을 재촉하는 채찍질을 당하며 전진합니다.
그러나 전장에서 두 군대가 맞붙는 모습에서 우리는 적과 아군을 쉽게 구별할 수 없습니다. 전장에서는 선과 악이나 똑같이 자비가 없고 개인의 존엄성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누구나 목숨은 하나뿐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전쟁에 나갔든, 어떤 서사를 지녔든 죽음의 신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합니다. 그렇기에 선은 언제나 밀릴 수밖에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악은 지켜야 할 것이 없으므로 진정한 용기가 없습니다. 강한 적이 나타나면 뿔뿔이 흩어지기 바쁩니다. 반면 선은 지켜야 할 대상이 있기에 두려움을 안고서도 용감히 맞서 싸우며 서로 연대합니다.
잠시의 두려움에 아군을 배신한 군인들은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혼령으로 남습니다. 펠레노르 평원 전투 이전, 곤도르를 배신한 망자의 군대는 곤도르의 후계자 아라곤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Fight for us, and regain your honour”
과거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전쟁에 임한 이들은 전투가 끝난 후 비로소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명예를 회복한 채 이승을 떠납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해야 할 싸움이 더 남았기에 그들을 더 묶어둘 수도 있었지만 아라곤은 약속을 지킵니다.
이후의 전투들 또한 명분이 충분하므로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라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의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은 끊임없이 자신을 설득하고 세상에 증명해야 합니다. 아라곤은 혈통만이 아니라 후계자다운 행위를 통해 자질을 인정받은 뒤에야 정식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됩니다.
선과 악이 충돌하는 공간은 전쟁터이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인 자연은 평화롭습니다. 톨킨의 판타지 세계관에서 호빗은 자연을 상징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들은 하루 여섯 끼를 먹고, 노래하고 춤추며 삶을 즐깁니다. 자연이 허락한 욕망을 최대한 충족하면서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전쟁을 모릅니다. 그러나 욕망의 결정체인 반지가 샤이어에 들어오고, 사우론의 시선이 그곳을 향하면서 호빗들 또한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욕망, 그리고 절대악에 맞서 전쟁을 치릅니다. 전쟁의 신은 일단 마주하면 어머니 자연이라도 그저 스쳐 지나가지 않습니다. 성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물론 판타지가 아닌 실제 세계에서 선과 악은 이처럼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역사 속의 전쟁에는 절대악도 절대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판타지 속 군인들은 아군의 죽음만 애도하고 상처만 치료하면 되지만, 현실의 군인들은 같은 인간과 싸우기에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목적이 있었다 해도 인간성을 담보로 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21세기의 시각에서 톨킨의 세계관을 바라보면, 선악의 구도는 과도하게 단순화되어 있으며 인종과 장애에 대한 편견이 곳곳에 드러나고, 미추(美醜)의 기준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자기중심적입니다. 저는 역사가로서 단순화되고 획일화된 설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닙니다. 단언할 수 있지만 역사 속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는 그 누구도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아닙니다.
하지만 처음에 언급했듯, 때로는 단면을 보아야 할 순간도 있습니다. 이러한 복잡함이 악의 흉측한 민낯을 가리는 서사로 작동하는 순간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지금 내 앞에 마주한 방패의 문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감상하기보다는 그 뒤에 누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내야 이 전장에서 적어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