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 커뮤니케이터, 제너럴리스트 그리고 유사학문

학자와 커뮤니케이터는 어떻게 다른가?

by Alfius Historographus

학자와 커뮤니케이터는 어떻게 다른가?


전문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과 습득한 지식에 대해 설명하는 능력은 아쉽게도 늘 함께 가지는 않습니다.


물론 리처드 파인만이나 메리 비어드 같은 유니콘들이 가끔 등장하기는 하나, 많은 학자들이 특히 비전공자들에게 연구를 설명하기를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대중에게는 학계의 거물들보다 소위 ‘커뮤니케이터’가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요.


이러한 커뮤니케이터들은 대학 교수에서 비전공자까지 그 범위가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학술 언어를 일반 언어로 바꾸어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이 없더라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학술 언어를 일반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 예로 일반인들이 ‘예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각자 이제까지 쌓아 온 경험과 독서, 선입관에 기반하여 상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 그 토대가 다르기 때문에 심도 깊은 논의가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큰 건물을 세우려 할수록 지반을 고르게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은 그 구조를 구성하는 용어들을 명확히 정의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물론 그 정의는 진리가 아니라 합의입니다. 이 합의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아쉽게도 해당 학문의 기존 논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과학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모두가 들어봤지만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할, 애증의 양자역학에 대한 설명들이 유튜브에 넘쳐납니다. 어떤 설명은 그럴듯하고 어떤 설명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중에서 내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 객관적으로도 가장 좋은 설명일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내가 듣기에 가장 잘된 설명이란 합의된 학술 언어를 나에게 가장 익숙한 일반 언어로 바꾸어 설명한 것입니다. 더 보편적인 일반 언어로 설명할수록 이해한(혹은 이해했다고 느끼는) 독자들은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더 보편적인 언어로 설명할수록 오차의 범위 또한 늘어납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이 경우 자칫하면 학술 언어와 보편적 언어의 공통 영역이 아닌, 보편적 언어의 교집합 밖의 개념들로 학술 언어를 이해하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과 인문학을 연결시키는 대담한 시도들이 대부분 과학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 언어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족을 핵심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일견 그럴듯하지만 큰 의미가 없는 담론들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담론들이 큰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기존 학계의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나름의 토대에서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시도들을 유사 학문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에는 유사 과학, 유사 역사학 등 다양한 유사 학문이 존재합니다.


유사 학문의 문제는 바로 그 토대에 있습니다. 학계의 토대는 오랜 시간 동안 해당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이 치열한 토론을 거쳐 합의에 이른 결과물입니다.


또한 그 토대는 한 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는 견고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니라, 계속해서 도전받고 방어되는 가운데 조금씩 수정되고 다듬어지는 정교하고도 취약한 구조물입니다.


유사 학문을 하는 이들의 단골 주장인 “학자들은 자기만 최고라고 생각하는 고집불통이고, 학계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꺼려하는 발전 없는 이익 집단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학계의 지적 생산물이 얼마나 치열한 peer review(동료 평가)를 거쳐 세상에 나오는지를 간과한 데서 비롯됩니다.


물론 일부 학자들이 학문을 일상에서도 만능의 권위처럼 휘두르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문이라는 체계의 본질이라기보다 그것을 다루는 개인의 태도 문제이며, 학문 자체는 오히려 그러한 태도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교정하도록 설계된 구조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유사 학문의 주창자들은 비판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의 토대는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의 경험이나 특정한 몇몇 자료에 기반한 경우가 많고, 그 외의 다른 사례나 증거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러한 편협한 토대에서 실제로 세상을 바꿀 만한 유의미한 학문적 성취를 얻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개인도 집단도, 사회도 발전을 이루려면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하며, 특정 분야의 진보나 혁신을 꿈꾼다면 그 분야가 현재 어디까지 왔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또한 전문가들 중에는 해당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뿐 아니라 폭넓은 식견을 가진(혹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제너럴리스트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제너럴리스트들의 식견은 일반인뿐 아니라 학문하는 사람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학제 간 연결고리는 종종 새로운 아이디어의 획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제너럴리스트들이 본인이 다루는 분야들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대로 된 제너럴리스트는 모든 분야로부터의 비판에 열려 있고 지속적으로 지식을 업데이트합니다.


혹 어떤 제너럴리스트가 자신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비판은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거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한다면 꼭 믿고 거르시기 바랍니다. 그런 이들은 유사 학문의 신봉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학문적 지식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 주는 커뮤니케이터들은 지식의 연결고리로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며, 때로는 경탄을 자아낼 만큼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이제까지 구축되어 온 학문의 과거 혹은 현재에 대한 설명일 뿐입니다. 제가 브런치에 쓰고 있는 역사 이야기 역시 비슷합니다. 다른 학자들이 이미 해 놓은 연구를 보다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글들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들을 실제로 유의미한 학문의 발전으로 연결시키는 사람들은 결국 학문 그 자체에 깊이 몰입한 사람들입니다. 학문의 세계뿐 아니라 현실 세계의 변화를 가져올 그들의 작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 학문 고유의 언어를 배우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를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자신도 좋은 커뮤니케이터가 되기 위해 늘 고민하고 노력합니다. 제가 익숙한 글쓰기 형식과 다른 형태의 글쓰기도 계속 탐색하고 연습 중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학문의 옷을 벗으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휘날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벗겨질까 늘 경계합니다.


모든 인간은 유한합니다. 따라서 한 개인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는 것도, 단 하나의 학문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모두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으며, 그 거인은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수많은 성실한 개인들이 축적해 온 성과의 집합입니다. 그 토대를 단단히 딛고 설 때 우리는 더 멀리, 그리고 두루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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