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인가 학문인가?

역사를 접하는 두 가지 방법

by Alfius Historographus

교양인가? 학문인가? : 역사를 접하는 두 가지 방법


SNS를 하다 보면 이공계 학문과 인문계 학문의 우열성(?)을 논하는 글들이 꽤 눈에 띕니다. 이공계 학문을 한 사람이 인문학을 하는 것은 쉬우나 인문학을 한 사람은 이공계 학문을 할 수 없다. 인문학은 은퇴 후에 취미로 해도 전혀 늦지 않다..등등. 사실 인문학을 교양으로, 취미로 소비하시는 분들이 많아질수록 인문학자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어떤 수준의 독자든 대환영이지요.


다만 흔히 보이는 ‘인문학은 쉽다’, ‘허들이 낮다’, ‘심지어 AI와 함께라면 반나절에 끝난다’는 표현은 상당히 생경합니다. 제가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중세 대학사를 연구한다고 하면 언제나 가장 먼저 듣는 말은 “어려운 공부 하시네요”였습니다. 그런데 왜 요즘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전공과 연령을 불문하고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쉬운 학문이 되었을까요?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의 집필 제안을 받고 편집자님과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 주신 요구사항은 딱 하나였습니다. “쉽게 부탁드립니다.” 그 외에는 마감일에 최종 원고가 넘어갈 때까지 단 한 마디의 첨언도 없었지요. 그런데 이 ‘쉽게’는 독자들에게는 참 매력적이나, 학자들에게는 머리를 싸매게 하는 단어입니다. 학계에 계시거나 거쳐 가신 분들은 대부분 공감하실 겁니다.


오늘은 대낮인데도 밖이 어둑한 흐린 날입니다. 저는 지금 스위치 하나로 스탠드 조명을 켜고, 순간 온수기로 물을 데워 따뜻한 차를 마시며, 노트북을 공책처럼 사용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600년 전에 살았던 중세인이었다면 절대 누리지 못할 호사입니다. 이 호사를 위해 어떤 과학적 발견들이 필요했고, 어떤 원리로 화면에 글이 써지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자연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실히 압니다. 단 1분만 정전이 되어도 누구나 체감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즐겨 보는 유튜브 영상 중 How to make everything이라는 채널이 있습니다. 아침 식탁에서 5분이면 먹어 치우는 빵 한 덩어리를 만들기 위해 밀농사부터 시작하지요. 꼬박 1년이 걸려야 물과 밀가루, 소금이 들어간 기본적인 빵이 나옵니다. 버터와 우유가 들어간 빵을 만들려면 소도 키워야 하니 몇 년이 더 걸리겠군요. 꿀이라도 첨가하고 싶으면… 더 말해 뭐 합니까?


자, 그럼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수백 권씩 쌓여 있는 ‘쉬운’ 역사책 한 권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요?


여기 중세사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장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중세 대학에서 교양학부 과정을 마치려면 4~6년 정도가 걸렸다.”


이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역사학자들이 어떤 작업을 했는지 알아봅시다.


1950년대에 엠든(Emden)이라는 학자가 "A Biographical Register of the University of Oxford to A.D. 1500"이라는 제목의 3권짜리 연구서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옥스퍼드 대학의 초기부터 1500년까지의 졸업생 약 15,000명에 대한 전기적 기록입니다. 알파벳순으로 각 졸업생의 이름, 소속, 학문적 성과 및 개인적 배경 등을 기술하고 있지요.


근거 자료는 대학 및 컬리지의 회계 기록, 졸업자 명부, 입학 서류, 사적 메모 등입니다. 이러한 문서들은 라틴어나 중세 영어로 작성되었고, 대부분 양피지에 깃털 펜으로 쓰였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중세의 문서들이 지금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 하나를 올립니다(사진 속 문서는 대학 행정 서류가 아닌 성서의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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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서들을 보려면 도서관에 연구자 등록을 하고 미리 신청을 해야 합니다. 책이 아닐 경우 자리에 앉으면 사서가 큰 상자를 하나 가져다줍니다. ‘Box no. ***’라는 이름이 붙은 상자 안에는 ‘MS ***’라는 제목의 양피지 조각들이 들어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누군가가 정리한 목록과 대조하여 원하는 자료를 바로 찾을 수 있고, 아니면 일일이 읽어보며 찾는 내용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중세 대학은 지금처럼 잘 관리된 체계가 있던 기관이 아닙니다. 필체는 물론이고 표기 방법도 제각각에다, 양피지 가격이 비싼 탓에 이면지 사용도 흔했습니다. 책으로 잘 묶여 있는 경우도 있으나 한 문서가 조각조각 나 있어 서로 다른 상자에 들어 있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조각난 문서들의 뒷면에는 또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어느 면을 기준으로 분류하여 상자에 넣어야 할까요?


이런 길고 지난한 작업을 끈기 있게 수행해 준 한 학자의 노고 덕분에 후학들은 비교적 쉽게(?) 몇십만 개의 산발적인 정보들을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하고, 비록 전체의 15~20% 정도에 불과하나 꽤 유의미한 통계들을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개별 인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연구하고 싶다면 그 인물의 출신 지역을 찾아가 교구 교회나 관공서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됩니다. 과정은 앞과 비슷하나, 대학 도서관보다 더 정리가 안 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는 대학 하나에 관한 연구일 뿐입니다. 14세기 이전에 설립된 대학만 해도 전 유럽을 통틀어 40개가 넘고, 특정한 대학이 아니라 ‘중세 대학’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문장 하나를 쓰려면 여러 개의 대학에서 위의 연구에 필적할 수준의 작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중세 대학에서 교양학부 과정을 마치려면 4~6년 정도가 걸렸다”는 문장은 누군가가 그 개별 데이터를 모두 종합하고 분석하여 나온 결과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쉬운 내용일수록 필요한 연구의 범위와 깊이는 더욱 넓어집니다. 제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고대 문명의 범주는 매우 넓어서… 아시아에서는 중국, 인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지역에서, 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 누비아 및 서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도시를 기반으로 한 문명들이 발생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아스테카, 잉카, 마야 문명이, 유럽에서는 그리스, 로마, 켈트 문명이 등장했어요.”


이 짧은 설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가 필요할지 짐작이 가시나요? 로제타 스톤을 해석해 낸 샹폴리옹의 일화가 잘 알려져 있으나, 전체 연구사에서는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지금도 발굴되지 않은 문명의 흔적을 찾아 발굴 작업을 계속하는 고고학 팀들이 새로운 증거들을 계속 가져오고 있지요.


다시 ‘쉬운 역사’로 돌아가 봅시다. 서점에는 수많은 역사책들이 종류별로 나와 있고, 유튜브만 틀어도 역사 콘텐츠들이 넘쳐납니다. 초등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반나절만 투자하면 세계사의 흐름을 한눈에 꿰뚫을 수 있다는 광고들이 눈길을 끕니다. 훈련된 역사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역사책을 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전문 역사가는 아니나 역사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인 어떤 분이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므로 학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어 좋다”라고 하는 인터뷰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전문가이든 비전문가이든, 성인용이든 어린이용이든, 역사책을 쓰거나 역사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누군가의 선행 연구물을 참고해야 합니다. 역사학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1차 사료라고 부르는 온갖 종류의 다양하고 산발적인 문서들을 선별, 해독하고, 진위를 판별하며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연구 결과물은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혹독한 피어 리뷰를 거쳐 학술지에 게재되거나 연구서로 출판됩니다. 이 토대가 없이는 어떤 3차, 4차의 결과물도 제대로 나올 수 없습니다. 역사는 쉬운 학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 몇 명이나 이런 작업을 실제로 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이공계 학자들이 저보다 훨씬 짧은 시간 내에 라틴어와 중세 영어를 습득하고, 다양한 필체의 필사본을 술술 해독하며, 복잡한 역사학 이론들을 다 이해해 연구에 바로바로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대중에게 쉽고도 재미있게 핵심만을 쏙쏙 뽑아 전달할 수도 있겠지요(물론 저는 역사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의 능력치는 제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이 모든 것을 혼자 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거인의 어깨에 서 있다는 격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 거인이 단일 존재가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했으며 자신이 가진 지적 능력 안에서 나름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 수많은 개인들의 집합체라는 사실은 흔히 간과되는 듯합니다.


빵은 빵집에 가면 얼마든지 사는데 농부가 왜 필요해? 스마트폰 사용이 이렇게 간편한데 프로그래머가 왜 필요해?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인문학은 쉬운데, 뭘 전공까지 해?”라는 질문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5,000년이 넘는 인류의 역사를 내가 집에 앉아 책 한 권으로 접할 수 있는지, 그 메커니즘을 짐작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인문학적 소양뿐 아니라 과학적 사고 또한 결여되었다고 볼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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