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학문의 자유: 그 기나긴 여정

by Alfius Historographus

작년 겨울 정권이 바뀐 후 미국의 행정부가 고등교육기관들을 검열하고 행정에 관여하는 상황이 많은 이들에게 경악과 충격을 주고 있으나 실상 중세 대학사 연구자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광경입니다.


중세 유럽의 대학은 일단의 방랑하는 학자들(wandering scholars)이 특정 지역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그들이 자리 잡은 지역과는 매우 동떨어진 성격의 집단이었고 외부인들에게 매우 배타적이었던 중세 도시 안에서 여러모로 취약한 처지에 놓이곤 했습니다. 때로는 지역 주민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지요.


이렇듯 불안정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대학은 당시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었던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여러 나라의 세속 군주들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잡고자 골머리를 앓던 교황은 기꺼이 이들을 받아들여 파트너로 삼았습니다.


교황의 인가를 받은 대학에 소속된 학생과 교수들은 세속 법정이 아닌 교회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성직자의 특권을 얻었고 이는 이후로 수 백년에 걸쳐 이어지는 소위 타운(town)과 가운(gown) 갈등의 시초가 됩니다. 역시 길고도 복잡한 역사를 자랑하는 타운과 가운의 애증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다뤄보겠습니다.


대학의 자율권과 관련된 가장 중요하고 상징적인 사건은 13세기 파리 대학에서 발생했습니다. 1229년 생 마르셀 교외에 위치한 술집에서 술 취한 학생과 주인 사이에 시비가 붙었습니다. 다음날 분개한 학생들이 무기를 들고 술집을 공격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폭동은 주변의 다른 지역으로 번졌습니다. 이에 도시 경비대가 개입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의 학생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는데 그중에는 폭동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았던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응하여 대학 측은 1229년 3월 27일 파업을 결의하고 모든 수업을 무기한 중단했습니다. 파리를 떠난 교사와 학생들은 오를레앙, 팔렌시아, 샹파뉴, 그리고 영국의 옥스퍼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으로 흩어져 학업과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이 여파로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파리 대학의 학자들이 전 유럽에 퍼지게 되며 의도한 바는 아니나 유럽 다른 지역의 대학 발전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요.


파업 기간 동안 대학 지도부는 왕비와 교황 특사에게 소수의 잘못된 행동으로 대학 전체의 안위가 위협받는 것은 부당하니 대학의 안전을 위한 법적 조치를 마련해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했습니다. 2년여에 걸친 협상이 이어졌고 그 역시 파리 대학 출신이었던 교황 그레고리 9세가 1231년 4월 13일, 대학에 상당한 특권과 자율권을 부여한 교황 칙서(Parens Scientiarum)를 반포하며 드디어 상황이 종식되었습니다.


이 칙서는 파리 주교를 포함한 지역 교회와 세속 권력 모두로부터 파리 대학의 독립성과 자치를 보장했으며, 대학을 교황청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두었습니다. 또한 교황의 명시적인 허가 없이 법 집행 기관이 대학 내에 진입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금지함으로써 외부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대학을 지키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한 대학에 강의 시간 설정, 강의 내용 및 커리큘럼 결정, 교수의 자격 심사 등을 관장할 수 있는 독자적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로 인해 대학은 지적 자유를 보장받고 자체적인 교육 목적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교수들에게는 임대료 분쟁을 포함한 다양한 도발 행위 시 강의를 중단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 대학 구성원들의 이익과 복지를 보호하는 강력한 도구를 제공했습니다. 이 획기적인 문서는 이후 수 세기 동안 파리 대학뿐 아니라 여러 유럽 대학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대학이 외부 권력들과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관계를 맺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중세 대학이 완전한 자율권을 보장받는 학자들의 천국이었느냐고 하면 당연히 아닙니다. 다른 권력들과의 관계에서는 대학의 편을 들어주었던 교황은 교회의 공식 입장과 반대되는 이단적 교리,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으로 대표되는 신학문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1206년경 파리 대학교 교수인 아말릭 데 베나가 범신론적 사상을 주장한 혐의로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가 화형에 처해진 사건은 그 한 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내부에서 새로운 학문을 향한 열망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심지어 툴루즈 대학은 당시 파리 대학에서는 금지되어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교과 과정에 포함시켜 학교 홍보의 기회로 삼기도 했습니다. 바로 인접해 감시가 가능한 세속 권력들과는 달리 교황은 비교적 멀리 있는 존재여서 통제에 어느 정도의 빈틈이 있었던 이유도 있으나 무엇보다 이미 물꼬가 트인 지식에 대한 열정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수세기동안 대학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교황의 잘못을 지적한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이 게시된 곳이 다름 아닌 대학의 정문인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중세 대학이 그 씨앗을 품고 있었으나 시대적 한계 속에서 온전히 발현되지 못했던 학문의 자유는 19세기 프로이센에서 훔볼트의 대학 개혁 정책에서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박사 학위의 기원을 다룬 이전의 포스트를 참조하셔도 좋겠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훔볼트 대학은 폭넓은 교육, 자유로운 지식 생산, 그리고 국가와 시장으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하며 오늘날 연구 중심 대학의 모델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모델은 당시 고등 교육의 기반을 닦기 시작한 미국으로 유입되어 본격적으로 발전하였고 1915년 미국대학교수협회(AAUP)가 발표한 학문의 자유와 교수 재직권에 관한 원칙 선언(1915 Declaration of Principles on Academic Freedom and Academic Tenur)은 중세 대학의 전통과 훔볼트의 이상이 어떻게 현대의 대학에 이어졌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선언은 교수들이 자체적으로 교수진을 구성하고, 입학 사정과 졸업 기준을 정할 자유를 가져야 함을 명시합니다. 또한 학자들은 자유롭게 연구하고 그 결과물을 자유롭게 출판할 수 있어야 하며 대학 외부에서 발언하고 행동할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인류의 진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탐색하고 그 발견을 검열이나 보복의 두려움 없이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간 미국의 대학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지식 산업을 주도하고 학문의 발전을 견인해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가진 자본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음식과 연료를 가득 싣고 만반의 준비가 된 배라 할지라도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면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 전체의 운명을 짊어진 항해에서 거센 파도가 닥쳐오는 위기의 순간에 새로운 해류를 발견하고 갈아타는 결단은 가장 높은 곳의 별을 바라보며 키를 잡는 항해사의 몫이어야 합니다. 기어이 키를 빼앗아 눈 앞의 고기떼를 쫓는다면 결국 다함께 표류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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