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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트로츠뎀 Jul 22. 2022

어색한 것들로 만든
이토록 매혹적인 러브 스토리라니!

박찬욱 감독, 탕웨이 박해일 주연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다

이토록 아름답고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를 지금 만나게 된 건 정말 행운이다.

영화를 본 세상의 남편들이 '잘 포장된 불륜 이야기 아니야?'라고 반문하지 않기를,

영화를 본 남자들이 '여자 주인공은 정말 예쁘더라'만 감상문으로 제출하지 않기를.,.,

어색한 것들로 만들어낸 이 아름답고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후 리뷰를 읽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이 리뷰는 무엇보다 귀에 착착 감기는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대사를 중심으로 쓰였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은 스릴러를 가장한 고혹적인 멜로드라마다. 우리가 한 사람을 만나 사랑을 시작하고, 그 사랑에 매혹되어 경이로워하기도 하고. 때론 흔들리다 마침내 무너지기도 하는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겪는 심리적 변화와 감정의 파고를 절묘하게 보여준다. 그 사랑이 지난 후에 남은 사람의 먹먹함과 아쉬운 갈망까지도. 그것도 보통은 이루어지기 힘든 부적절하거나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한 관계의 것들로 만들어낸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형사와 용의자의 관계에서는 보통 이런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생겨나기 어렵다.

의심과 확신

언제나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최연소로 경감이 된, 직업의식이 투철하고 사명감이 강한 품위 있는 수사관과 남편의 죽음에도 동요하지 않는 젊은 여성 피의자의 만남은 의심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형사 해준과 용의자 서래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가능한 한 서로를 최대한 경계해야 하기에. 한쪽은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야 하고 다른 한쪽은 숨겨진 거짓을 진실로 드러내야 하기에. 그러나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가 같은 종족의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시신 사진이 보기 불편하다고 회피하지 않고 사태를 제대로 보려고 하는 '꼿꼿한'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형사와 용의자의 관계를 넘어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한다. 그리고 보통은 어색한 관계여야 할 두 사람은 가장 편안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피의자 심문 과정은 편안하게 진행되고 간간히 웃음이 배어 나온다. 피의자에게 최대한 쉽고 친절하게 경위를 설명해주고, 핫도그가 아닌 고급 초밥 도시락을 제공하고, 감시와 잠복근무는 관심과 배려가 된다. 의심에서 시작한 이 형사와 피의자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확신으로 변화하면서 그 어떤 관계보다 편한 관계로 바뀐다. 그래서 늘 불면증에 시달리는 형사 해준은 서래를 감시하다 자신도 모르게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든다. 또 자신을 수시로 찾아와 감시하는 형사 해준의 존재에 서래는 '친절한 형사'가 자신을 살펴주고 지켜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두 번째 살인사건의 피의자 신분이 되었을 때 해준에게 서래는 이렇게 말할 정도이다.

"피의자, 나 그거 좋아요, 편하게 대해 주세요, 늘 하던 대로, 피의자로."

형사 해준은 용의자 서래에게서 자신과 닮은 모습들 발견하고 점차 의심을 거두고 그녀에게 빠져든다. 안개가 사물의 흔적을 지우듯 서서히 피의자에게 현혹되는 것이다. 간혹 서래가 어떤 색의 드레스를 입었느지, 녹색인지 청색 인지도 모호하고, 그녀를 만난 곳에 눈이 왔는지 안 왔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마치 그녀와 만난 것이 현실이 아니라 꿈 속인 듯이.

의심이 사라진 잠복근무와 감시는 지켜줌이자 배려가 된다. 그래서 해준이 서래에게 사건 종결 소식을 알리는 순간은 의심이 끝나는 순간이자 조심스러웠던 자신들의 감정에 대한 확신의 순간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사랑의 감정,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은 그들에게 무엇보다 기쁜 순간이다.

그래서,

"사건 종결됐어요. 당신은 더 이상 용의자가 아닙니다."라며 사건 종결을 알리는 해준의 표정에서 설렘을 발견한 서래는 해준에게 "기쁜가요?"라고 묻고,

이에 자신의 감정을 들킨 해준은 흠칫 놀라, " 네? 제가 왜요? 맞아요. 기뻐요."라고 더듬거리며 답하며,

"왜요?"라고 꼿꼿하게 묻는 서래에게,

"네? 그냥 뭐 이제.. 더 이상 우리가.. "라고 자신의 본심을 조심스레 드러낸다.

그러자 서래는 "우리요?"라고 되물으며 그들이 서로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의심을 멈추게 했지만, 의심은 다시 그들의 사랑을 멈추게 한다.

의심이 다시 시작된 지점에서 이 사랑은 멈추게 되고 그들은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해준의 '헤어질 결심'이 서래와의 관계를 어색하게 정리하고 자신의 품위를 되찾는 것이라며,

서래의 '헤어질 결심'은 서준과의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래와 사랑에 빠진 해준이 마침내 서래가 남편을 죽인 진짜 범인임을 알게 되고,

서래에 대한 사랑이 용의자를 의심해야 하는 형사로서 자신의 본분을 망각시켰음을 알고,

자신에 대한 서래의 사랑이 위선일 수도 있음을 알고 오열한다.

이미 가슴 깊이 파고든 사랑의 감정과 이성이 찾아낸 진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몸서리치며

절망하는 해준과 그 사랑을 위로하는 서래.

이제 사랑이 시작된 서래의 '우리일'과 사랑이 끝난 해준의 '우리일'은 서로 다르게 적힌다.

자신을 현혹시켜 속인 것 아니냐며 서래를 비난하는 해준에게 서래는 자신들의 사랑을 부정하지 말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 우리 일이요? 어떤 우리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그리고 절망과 회한 속에서 사랑하는 이에 대한 마지막 배려로

해준은 살인의 증거물을 은닉할 것을 서래에게 속삭인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트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형사로서는 완전히 무너진 해준의 이 말은 그러므로 서래에게는 가장 강력하고 진심 어린 사랑 고백이다. 형사가 자신이 사랑한 용의자에게 하는 말로써는 증거은닉을 도와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연인으로서 해준이 서래에게 전하는 '헤어질 결심'이다. 그들의 사랑을 이제 영원이 묻고 여기서 멈출 것을 말하는.

그들의 사랑은 이제 깊은 바닷속에 감추지 않고서는 계속 떠올라, 도무지 지워지지 않고 잊히지 않을 것임을 말하는.

형사로서 자부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해준이 전하는 이 말은 서래에게 가장 은밀한 사랑의 속삭임이다. 서래에게 해준의 그 말, "헤어질 결심'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분명한 사랑의 말이다. 그래서 해준의 그 말, 사랑의 고백을 담은 그 말이 너무 좋아서 자주 듣다가 결국 두 번째 남편에게 발각되어 서래가 두 번째 살인에 휘말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해준이 형사로서의 자부심과 품위를 버리고, 감정적으로 무너진 상태에서, 이성의 제약을 벗어나

사랑에 빠진 가장 연약한 존재로서 해준이 서래에게 전한 그 말은 외국인인 서래에게 가장 정확하게 번역되었다. 그래서 서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당신의 사랑은 끝이 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은 시작됐어요."

사랑은 잘못 번역될 수 있는 외국어

형사와 피의자라는 어색한 관계에 더해 서래와 해준의 관계에는 발전되기 어려운 장애요인이 한 가지 더 있다. 한국인과 중국인으로서 해준과 서래는 또 다른 장벽 즉, 언어의 장벽에 부딪힌다. 그것은 바로 모국어와 외국어라는 언어의 간극이다. 드라마를 통해 한국말을 익힌 서래는 드라마에 나온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종종 어색한 어휘와 문장을 구사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얼핏 자연스럽지 않은 듯 들리는 서래의 말들이 서래를 사랑하는 해준에게는 무엇보다 정확하고 신선하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전하기는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외국인인 두 사람 사이에서 그 일은 큰 장벽이 아닐 수 없다. 그들 사랑의 언어들이 전달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그 언어들은 간혹 부적절해지기도 하고 일단 번역되어야 한다.

그래서 서래는 자신을 소개할 때,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부족합니다."라고 먼저 말하게 된다. 또 감정 표현이 복잡해지거나 말의 호흡이 빨라질 때 서래와 해준의 말들은 번역되어야 한다. 격한 감정이나 중요한 내용을 표현할 때 서래는 중국어로 녹음한 뒤 이를 휴대폰에 있는 번역기를 이용해 번역해 준다. 그런데 사실, 이들이 번역기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전하는 방식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사랑의 말을 전하는 방식과도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말들은 얼마나 많으며, 그 말들은 서로에게 외국어일 뿐 아닌가.

때론 번역기가 골라준 어휘가 올바른 어감을 살리지 못할 경우에 사랑의 언어들은 공포의 언어로 왜곡되어 전달되기도 한다. 서래가 자신에게 까마귀를 물어다준 고양이에게 남긴 이런 말처럼.

"또 까마귀야? 내가 너에게 밥 준다고?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외국인인 서래는 사극이나 드라마를 통해 한국어를 배우기에 자신의 미묘한 감정을 가끔 그 대사들을 차용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래가 어눌한 어조로 자신의 진심을 표현할 때 그 울림은 더 크게 다가온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당신 만날 방법이 오로지 이것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자기 사랑의 정당성을 항변하고 자진의 절박함을 호소하는 서래의 이 서툰 대사들은 그래서 깊게 공명한다.

서래가 사용하는 단어와 대사들이 어색하지만 그 어눌함과 서툼이 오히려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결국이나 끝내 대신 등장하는 '마침내'와 유일한 대신 사용된 '단일한'이 그렇다. 그러나 마침내 서래를 사랑하게 되는 해준에게 서래의 그 어색한 표현과 어휘들은 그 어떤 말보다 정확하게 이해된다.

그렇게 그들은 마침내 서로의 '단일한' 사람이 된다.

해준은 자신이 할 줄 아는 '단일한' 중국음식을 서래에게 해주고,

서래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려주며 해준의 불면증을 재워준다.

사랑은 영원히 종결될 수 없는 미결 사건

사태의 본질을 회피하지 않으려 하기에,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기에 수시로 안약까지 넣을 정도록 항상 눈이 건조하고,

미결 사건을 두고는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는 사명감 높은 형사 해준이기에

서래라는 여자에 미쳐서 자신이 망친 수사로 해준의 자부심과 품위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 붕괴의 순간에 해준이 남긴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트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는 말은 해준에겐 사랑의 확신이 깨진 순간을 확인하는 해준의 '헤어질 결심'이다.

그래서 해준은 서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그러나 서래에게 해준의 말은 자신과의 사랑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된 연인이 전하는 그 무엇보다 달콤하고 진실된 사랑의 속삭임이다. 그리고 그 이루어질 수 없는 '단일한' 사랑과 '헤어질 결심'을 하는 서래가 선택한 방법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두 번째 결혼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두 번째 살인 사건에 마주한다.

다시 형사와 피의자로 만난 해준과 서래는 어색하게 말해도 정확하게 이해되던 첫 번째 심문 때와는 달리 헛도는 질문과 대답을 이어간다.

첫 번째 남편의 피살로 인한 심문이 불신을 지우며 사랑을 키워나가는 과정이었다면,

두 번째 남편의 피살로 인한 심문은 자신들의 사랑을 애써 부정하고 의심과 불신을 키워나가려는 과정이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왜 결혼했냐고 묻는 해준에게 서래는 "당신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랑 결혼해주지 않으니까" 라고 답한다.

서래는 다른 남자 즉,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사랑하지도 않는 주식 애널리스트와 결혼했다.

'연고도 없는 곳에 왜 왔냐'라고 묻는 해준에게 서래는 '연고가 없어서 왔다'라고 말하며 해준이 자신의 유일한 연고이며 유일한 사랑임을 고백한다.

다시 찾아온 사랑 앞에서 아무리 그 사랑을 부인하고 의심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해준은 서래에게 도대체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반복해 묻는다.

해준도 이미 알고 있는 그 이유에 대해 서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기 왜 왔는지 당신한테 중요해요? 당신한테 그게 왜 중요한데요?

당신 만날 방법이 오로지 이거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이 얼마나 분명하고, 진심 어린 사랑의 고백인가.

형사와 용의자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아무리 서로를 의심해 보려 해도 서로에 대한 사랑만 확인할 뿐이다. 사실, 해준은 서래를 우연히 다시 만난 날 다시 사는 거 같았다. 마침내.

그래서 서래를 연행해 가면서도 다시 그녀의 숨소리에 맞춰 잠들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두 번째 남편이 칼에 찔려 피투성이 시신이 되어 수영장에서 발견되자 서래는 이 장면을 무서워할 해준을 생각한다.

그래서 힘들게, 살해당한 남편의 시신을 물로 깨끗이 닦아 낸다.

해준을 지키기 위해, 해준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서래가 선택한 방법은

해준의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되는 것이다.

해준이 스스로 붕괴되면서도 서래를 지켰듯이, 이번엔 서래가 자신을 던져 해준을 지켜준다.

형사로서 자부심이 강한 해준이 범인이 자신임을 결국 밝혀 낼 것임을 알면서도 서래는 자신의 두 번째 남편이 살해되도록 '유도'한다. 자기 범죄의 증거물이자 그들 사랑의 증거물인 핸드폰을 자신이 아니라 해준을 위해 바다에 던져 버리지만 해준은 끝내 그 핸드폰을 찾아내고 진실과 마주한다.

결국 서래가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선택하는 '헤어질 결심'은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서래는 안개가 차오르는 바닷속으로 조금씩 묻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