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또, 봄이 온다고

by 주민영

01.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수십 번도 더 구겨버린 종이였지만, 또 몇 번이라도 그렇게 할 일이었다. 몇 줄의 글을 더 쓰다 말고 공책을 덮어버렸다. 공. 책? 지금은 노트가 더 입에 익어, 새삼 공책이 주는 어감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 오랜 이름도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면 좋으련만.


02.

책장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몇 권의 책을 알라딘 중고 서점에 팔아버렸다.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가격을 어림해보고 간 터라 책정된 가격이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매겨지는 가격에 항의하는 손님이 많은지, 일일이 가격 책정에 관한 안내문이 비치되어 있다. 가격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책장 속에 묵혀둔 오래된 집착을 떨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았다. 가격 확인을 하라는 안내와 함께 점원이 내민 영수증에 서명을 하고, 돈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면 두 봉지와 달걀, 두부 따위를 산다.


03.

오피스텔 입구에 목련이 피었다. 아차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빼고는 조금 얇은 외투를 걸쳐 입었다. 나는 내 두툼한 외투를 더 꼭 여몄다. 나는 아직 겨울 속에 있다.


04.

요즘은 어때?라는 질문에 답은 늘 정해져 있다. 뭐, 그냥저냥. 그런 식의 의미 없는 대화가 나뿐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형식적으로 던져진 말에, 달리 뭐라 답할 수 있을까. 실은 얼마 전에 서점에 책을 팔러 나갔는데, 그게 한 달 만의 외출이었어. 그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신세 고백을 원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05.

좀처럼 쓸 수 없는 소설은, 어쩌면 내버려두는 게 답이다. 그런 마음으로 몇 년째 내버려둔 글들이 벌써 몇 편이다. 완성에 대한 의지도 목표도 없는, 그저 태어나기만 하고 맺어지지 못하는 인생.


06.

독촉 전화는 몇 번을 받아도 절망적이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나와는 별개로, 상대방의 목소리는 너무도 냉담하다. 평온을 가장한 내 목소리는 그래도 곧잘 대답을 한다. 네, 네. 몇 번의 무의미한 대답을 뇌까리고 통화가 끝났다. 지갑을 연다. 책을 팔고 오면서 달걀과 두부 따위를 사고 남은 5300원이 내가 가진 전부다. 로또? 사람이 구석에 몰리면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가능성 없는 헛된 망상이 머리를 맴돈다.


07.

구인구직 사이트에 글자들은 넘쳐 나지만,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읽히는 것이 없다. 시급이 얼마, 월급이 얼마. 숫자들이 개미떼처럼 엉켜 붙어 살갗을 깨무는 것 같다. "형식적인 면접, 즉시 출근 가능." 거기에 혹해서 용기를 내 가봤지만, 너무 '헤비'하다는 이유로 형식적인 면접은 그렇게 끝이 났었다.


08.

살갗의 묵은 각질을 민다. 아주 오래 몸에 밴 것들이 어떤 다른 것으로 대체될 때, 누구는 혁신이라고 하고 누구는 탈피라고도 했다. 나는 각질인 줄 알고 떼어낸 것들이, 사실은 내 살들이 아니었을까 싶어 자꾸 수챗구멍을 살핀다.


09.

환기를 시키려 열어둔 창문을 닫는다. 나는 아직 겨울 속에 있다. 요즘은 어때? 라는 질문에 답은 늘 정해져 있다. 뭐, 그냥저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