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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세희 Jan 08. 2020

가장 불쾌한 해피엔딩, <미드소마>

영화 미드소마 리뷰


 여름, 낮 그리고 축제. 이 세 가지 키워드는 포근한 로맨스 영화를 연상시킨다. <미드소마>의 첫 트레일러가 공개됐을 때 술렁이던 유튜브 댓글창이 떠오른다. 아리 애스터의 로맨스라니. 전작 <유전>을 떠올려보면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빛과 다채로운 색감의 조화가 어우러진 호러 영화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리 애스터의 작품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장르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 뒤에 숨겨져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호러 영화의 흔한 클리셰가 그러하듯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떨지 잘 알면서도 결국 한순간의 충동에 매료되고 만다. 그런 부분에서 아리 애스터와 그의 작품은 꽤 범상치 않다고 할 수 있겠다.


 <미드소마>의 가장 큰 주제는 주인공 대니의 상실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모두 대니의 상실과 연관된다.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경험에서 비롯된 대니의 감정선은 영화의 흐름을 지배한다. 호러 영화의 별미라고 할 수 있는 고어나 점프 스케어는 관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선에서 미적지근하게 연출되는 반면, 관객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미드소마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내기 어렵다. 영화가 끝난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마치 내가 그 긴 축제에 함께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드소마>의 러닝타임은 2시간 18분으로 꽤 긴 편에 속한다. 이 러닝타임 동안 관객은 주인공인 대니의 불안감을 공유하고, 하지제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하게 된다. 이처럼 아리 애스터는 대니를 통해 관객을 미드소마에 초대한다.   



 영화 초반부 내내 대니는 곧 터질 것만 같은 시한폭탄처럼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가족을 잃은 상실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동생의 환영을 본다. 크리스티안과의 관계 또한 불안정하다. 결국 서로 간의 관계가 어느 순간 깨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대니와 크리스티안 모두 짐작하면서도 불안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녀가 경험하게 되는 하지제는 사실상 불안의 연속에서 찾은 도피처이자 이별여행과 다름없는 셈이다. 그녀가 가장 의지하고 기대야 할 대상인 크리스티안은 그녀의 생일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니는 하지제 동안 '호르가'라고 불리는 마을 공동체와 함께 생활하며 상실의 고통을 잊으려고 애쓴다.


 아리 애스터의 <유전>과 <미드소마>의 공통점은 종교적인 색채와 가족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점은 아리 애스터의 유년 생활은 지극히 평화로웠다는 점이다. 두 영화 모두 상실 트라우마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유전>은 좀 더 오컬트 영화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겠다. <미드소마>는 공포에 대한 직접적인 연출 대신 관객의 심리적 요소를 파고든다. 성교를 하는 두 남녀를 전라 상태로 둘러싸고 앉아 지켜보는 사이비 공동체의 장면 왠지 모를 괴리감 우스꽝스러운 연출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동시에 불쾌감을 안겨준다. 이 장면은 영화 내의 그 어떤 장면보다 강렬하게 뇌리를 강타한다. 이 장면을 보고 난 뒤 느껴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기분은 어쩌면 슬래셔 영화의 고어 요소보다도 더 찝찝하다.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초안 단계의 미드소마는 슬래셔 영화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시나리오나 연출에 있어서 <유전>처럼 참신하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 <유전>은 종교를 소재로 한 오컬트를 주제의식으로 삼았다. 현실과 초자연적 현상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연출과 효과를 통해 관객에게 혼란을 선사하는 전개과정과 감독이 선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알리며 끝맺음하는 엔딩은 <곡성>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이처럼 <유전>은 시나리오와 연출이 잘 맞물린 대중성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미드소마>가 주목받은 이유는 비슷한 결의 매니악한 B급 감성 고어 영화들과 달리 공들여 만든 웰 메이드 A급 감성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빛과 파스텔 톤이 어우러지는 영상미, 룬 문자, 하지제 소품과 화려한 의상 등 세세한 고증은 이 영화를 단순히 슬래셔 영화로 치부하기엔 너무 정성스럽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5월의 여왕이 된 대니는 메이퀸을 축하하기 위한 만찬에서 마을 사람이 건넨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삭힌 청어를 먹으려 하지만 바로 뱉어내고 만다. 하지만 대니는 즐거운 듯 환한 웃음을 띄우며 만찬을 즐긴다. 이 장면은 대니가 그들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화합하고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성대한 축하 의식을 치르는 동안 대니는 마을 공동체를 통해 상실의 고통을 치유하게 된다. 호르가의 사람들이 대니를 가마에 태우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하는 장면에서, 배경에 있는 수풀은 호스를 입에 연결한 채 죽어있던 여동생의 형상을 띄고 있지만 대니는 그 형상을 등지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이겨내지 못했지만 괜찮다. 이제 대니는 우아한 봄의 여왕이니까.



 의식에 받칠 산 제물을 선택하는 시간이 되자 대니는 망설임 없이 크리스티안을 지목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침내 종착지를 맞이한다. 노란 움집에서 크리스티안과 함께 산 제물로 받쳐진 잉마르는 의식을 위한 숭고한 희생에 의의를 두지만 몸에 불이 붙자 고통스럽게 울부짖는다. 대니 일행이 호르가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봤던 '절벽' 의식을 떠올려보라. 영화 속 공동체가 믿고 있는 관례에 따른 죽음은 숭고한 희생과 당연한 순리처럼 묘사가 되고, 절벽에서 망설임 없이 뛰어내린 여성 노인처럼 실제로 그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지만 오랫동안 신자로 살아온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극한의 고통과 죽음 앞에는 신념조차 무력해지는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잉마르의 비명은 죽음과 고통 앞에서는 대의를 위한 희생보다도 살아남고 싶은 욕망이 더욱 간절한,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담아낸다.


 곰 가죽을 뒤집어쓴 채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크리스티안의 모습은 황당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노란 움집이 거세지는 불길에 완전히 휩싸이대니의 표정은 점차 밝아진다. 외지인으로서 맞이한 처참한 비극의 끝을 지켜보는 대니의 얼굴에서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봄의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에는 환희가 가득하다. 오로지 제 3자의 입장에서는 멀쩡한 사람들이 사이비 공동체에 놀아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는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대니에게 있어서는 상실에서 벗어나고, 매듭짓지 못한 관계를 완전히 마무리하는, 트라우마로부터의 해방에 가깝다. 미드소마의 결말에 대해 논한다면 글쎄, 우리에게는 배드엔딩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대니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행복한 결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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