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불변의 진리이다. 하지만 죽음이 어떻게 찾아올 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는 없다.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죽음의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지만 그 과정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이 아닌 현실이다.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평생을 고뇌하며 스스로에게 끝없이 내던지는 질문이지만 그 결말을 맞이하기 위한 여정의 끝무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병들고 늙은 몸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우리가 늙어가는 과정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긴 터널을 걷는 것과도 같다. 결국 언젠가 터널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눈앞에 펼쳐진 아득한 어둠을 보고 불안감에 휩싸인 채 한 보씩 걸음을 옮기며 짙은 암막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 편이 더 나아.'(It's better this way.) 미겔이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는 이 말은 삶의 단막과도 같다. 그 누구보다 자신의 잇속을 챙기며 세상을 살아온 미겔은 혼자다. 혼자인 그는 제 발로 요양원에 발걸음을 들였지만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노인들은 가족에게 등을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요양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그들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미겔이 되려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미겔의 외로움은 그 자신의 선택이었으니까.
<노인들> 속 등장인물의 시간은 각자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던 순간에 멈춰있다. 한 때의 순간을 꿈꾸는 이들의 현실은 회색빛 쳇바퀴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요양원은 모두가 순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종착지이다. 요양원에 있는 이들은 스스로 회색빛 쳇바퀴 속에서 나가길 거부한다. 요양원에는 수영장이 있다. 수영을 하는 사람은 없지만 수영장은 있다. 계절이 지나도, 수영장은 늘 비어있다. 에밀리오는 아무도 없는 수영장 속을 헤엄치며 젊은 나날을 떠올리지만, 그는 여전히 재킷 위에 니트를 입는 치매 걸린 노인이다.
이 따뜻하고 포근한 색감의 애니메이션이 시사하는 바는 암울하고 외롭다. <노인들>은 한 때 평범한 이들이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 그 일상을 그려내고 있음에도 많은 생각을 들게 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에밀리오의 치매 증상은 악화되고 마침내 그는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2층행 환자'로 진단받는다. 이 과정에서 기억을 잃을수록 점차 자신의 존재 또한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는 한 노인의 말로를 느낄 수 있다.
영화의 끝무렵, 2층에 올라간 에밀리오가 자신의 곁에 있는 친구 미겔을 보고 웃는 장면이 있는데 원작 만화에서는 이 장면을 치매에 걸린 에밀리오의 시점에서 다룬다. 에밀리오의 시점에서 미겔은 형상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흐릿하게 보이는 상태지만 그는 미겔을 향해 활짝 웃는다. 돌로레스 부인의 보살핌을 받는 치매 환자 모데스토가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며 식사조차 제대로 못하는데 뭐가 저렇게 행복할까 하고 의문을 품던 에밀리오를 생각하면 의미를 곱씹게 되는 장면이다. 에밀리오는 치매 증세가 깊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웃음의 의미를 깨달았다. 영화에서는 연출의 한계로 인해 이 부분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불편하고 까칠한 룸메이트인 미겔은 현실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친구를 위해 자진해서 2층에 올라간다. 그는 돌로레스 부인을 보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결국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한다. 에밀리오는 기억을 잃어가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마냥 슬퍼 보이지 않는다. 이 두 사람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서로가 있다.
이 노인들의 일상은우리가 맞이할 미래이다. 자신을 좀먹어가는 시간과 병환은 순응해야 할 현실이다. 그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그에 대한 답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와도 같다. <노인들>은 우리에게 심오한 물음을 던지기보다는 여러 인물 상을 통해 노인의 삶을 그려낸다. 영화는 긴 여정을 항해하는 방법이동반자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여정을 어떻게 항해할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당신은 어떤 노인으로 현실을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