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_ 흠이 보일 때 비로소 붙잡게 되는 마음

단단함보다 헐거움에서 시작되는 신뢰

by Evanesce

Vulnerable [ vʌlnərəbl ]

1. (~에) 취약한

2. 연약한(신체적, 정서적으로 상처받기 쉬움을 나타냄)


사람들 앞에서는 언제나 단단해야 할 것처럼 굴며 살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단단한 태도가 아닌 조심스럽게 드러난 부드러움일 때가 있다.


유리컵처럼 맑고 깨끗한 말보다, 모서리에 이가 살짝 나간 머그컵에 더 정이 갈 때가 있고, 멀끔한 맞춤 정장을 입고 있는 사람보다 오래 입어 목이 헐거워진 티셔츠를 걸친 사람이 더 믿음직해 보일 때가 있다. 우스운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사실 '완벽한 사람'보다 '약간 비뚤어진 사람'에게 마음이 더 편하게 열릴 때가 있다. 그 빈틈이야말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와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쩌면 '나는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너에게는 나의 등을 보여 줄게'라고 말하는 것 같다. 믿는다는 것은 결국 나 스스로를 상대에게 맡길 만큼의 여지를 허락하는 일이고, 그 상태는 거창한 고백보다도 조용한 허용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평범한 대화 중에도 문득 이 사람이 어떠한 나의 결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 비로소 신뢰는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내 옆에 머무는 기척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흔히들 '취약함'은 약점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신뢰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일 수 있다. 늘 칼날을 들고 있는 사람 옆에서는 그 어떤 대화도 깊게 이어질 수 없다. 반대로, 자신이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빈 손을 내미는 사람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경계가 풀린다. 상처받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문을 닫고 버티는 태도는 겉으로는 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불안한 상태이다.


가끔 인간관계는 시소처럼 느껴진다. 한쪽이 먼저 살짝 몸을 기울여주기 전까지는, 양쪽 모두 균형을 잃을까 봐 움직이지 못한다. 누군가가 먼저 기울여주는 순간, 그제야 다른 사람도 천천히 몸을 옮길 수 있다. 상대가 나를 밀어도 되는 각도로 몸을 내어주는 일, 그래서 오히려 서로가 더 단단히 균형을 잡게 될 수 있는 아이러니한 방식에 견고함이 있다.


완벽한 사람에게는 마음을 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틈이 없기 때문에 내가 그의 곁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를 알 수가 없다. 이와 반대로, 자신의 어딘가가 충분히 헐거워져 있는 사람은 이상하게도 더 큰 안정감을 준다. 죄책감이나 불안 때문에 흔들리는 모습조차 숨기지 않았을 때, 그 사람은 오히려 더 믿을 만해진다. 신뢰는 실수 없는 완벽함에서 생긴다기 보다는, 실수를 감추지 않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종종 "그 사람 앞에서는 괜히 힘을 빼게 된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가 있다. 상대가 약해서가 아니라, 내가 약해져도 괜찮을 만큼 안전하다는 뜻일 테다. 그러므로 '완벽하지 않지만 그 상태 그대로 네게 보여 줄게'라는 태도는 항복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 방어의 기제라면, 나를 단단히 연결해 주는 것은 헐거움과 연약함이다. 안전하다는 느낌은 보호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서로가 동시에 빈손일 때 비로소 생겨날 수도 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오래 '버티는 법'만 배운 것인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내려놓는 법'이 관계를 더 오래 지탱하게 만들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단단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오래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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