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_ 아직 이름을 얻지 않은 마음

언젠가 빛으로 나아갈 형태를 기다리며

by Evanesce

Emerge [ iˈmɜːrdʒ ]

1. (어둠 속이나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오다[모습을 드러내다]

2. 드러나다, 알려지다

3. 생겨나다, 부상하다


때때로 우리가 걷는 길은 너무 어둡고 조용해서, 지금 밟고 있는 자리가 어디쯤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발끝으로 느껴지는 감각만으로 바닥의 모양을 확인해야 하고,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내 몸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잠시 멈춰 가늠해야 하는 시간들이 이어진다.


그림자 속에서는 무엇이 누구의 모습인지조차 흐릿해지고, 내가 가진 윤곽마저도 희미해지는 것 같아 스스로를 놓칠까 봐 하는 마음에 조심스러워지곤 한다. 그럼에도 한 곳에서 아주 미약하게 번져 나오는 빛이 있기에, 우리는 그 빛을 향해 느슨한 직선처럼 보이는 길 위를 천천히 따라가게 된다.


빛은 희미하고 방향도 불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발걸음을 멈출 이유는 없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이 전진을 선택하는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떤 것이 이 길 끝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이 마음이 가로지르는 방식을 그대로 두고 바라보면, 비록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 마음은 말로 꺼내기에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억누르기에는 이미 제 나름의 방향을 가진 상태다. 그래서 오늘도 빛의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Emerge라는 단어는 이러한 상태를 조용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단숨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통과하는 동안 조금씩 선명해지는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마치 오래된 암실에서 사진이 현상되는 순간처럼,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미지가 천천히 떠오르는 것처럼, 내면의 무언가도 그렇게 모습을 갖추어 간다.


이 과정은 서두른다고 빨라지는 것도 아니고, 멈춘다고 완전히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는 결국 스스로의 페이스로 빛 쪽으로 밀려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흐름 속에는 말하지 못하는 현재의 감정도 포함된다. 어떤 감정들은 아직 세상에 꺼내지지 않은 채 깊은 곳에 머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시기가 있다. 그 감정이 누구를 향하는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속에서는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아직 이름조차 얻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그 존재가 삶의 어떤 층위를 천천히 바꾸기 시작한다면, 이는 분명히 움직이고 있는 감정이다. 다만 지금은 그 움직임을 크게 흔들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껴지기에 그렇게 행하는 것일 뿐이다.


어둠 속에서도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감정의 온도가 문득 떠오르는 순간들 말이다. 그 온도는 지금 밝힐 수 없는 마음의 이유가 되고,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그 감정의 전부를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마음의 흐름을 더 섬세하게 지켜보게 만들고, 그 섬세함 속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다시 이해하게 된다.


알려진다는 것은, 단지 누군가 앞에 서서 자신을 밝히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긴 시간 동안 형태 없이 떠다니던 마음이 마침내 그림자를 벗어나 또렷한 모습을 얻었다는 뜻에 더 가깝다.


지금은 그 모습이 아직 명확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이 언젠가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낼 만큼 단단해지는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말을 아끼지만, 그 아낌 속에서 오히려 이 감정의 깊이를 조금씩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언젠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날이 온다면, 품고 있는 이 마음도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는 형태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로운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아직 말을 붙이지 못한 감정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날을 바라보며 걸음을 이어가는 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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