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껏 쌓아 온 시간에 대하여
돌이켜보면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도 없이, 아주 오래전부터 같은 도화지 앞에 서서 천천히 손을 움직여 왔던 것 같다.
처음부터 어떤 그림을 완성하겠다는 약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언젠가 어떤 모습이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상상 속에서 선을 그려나가기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하루의 끝에서, 혹은 하루의 시작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시선과 말의 여운 속에서 손이 먼저 움직였고, 그렇게 남겨진 획들이 하나둘 겹쳐지며 지금의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어떤 날에 그린 선들은 분명하고 또렷했지만, 어떤 날의 흔적은 스스로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옅기도 했다. 때로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날처럼 보이던 적도 있었고, 그저 도화지 앞에 함께 서 있기만 한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 공백마저도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간 것이 아니라, 다음 선을 받아들이기 위해 숨을 고르던 순간이었다는 것을. 함께 그려나가는 그림은 그렇게,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들이 점점 쌓이며 조금씩 깊이를 얻어간다.
함께 그려온 이 그림이 어떤 형태로 현출 될지는 아직 알 수는 없다. 선들이 모여 하나의 윤곽을 만들지, 끝내는 흐릿한 경계로 남을지, 혹은 여백이 더 많은 그림이 될 지에 대해서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의 모양이 아닌, 이 그림이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 방식으로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로 설명되지 않은 마음, 조심스럽게 건네진 배려, 사소한 우리의 선택들이 소리 없이 쌓이며, 도화지의 질감 자체를 조금씩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은 먼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이다.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 서로의 획이 겹칠 때 지워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속도를 맞추는 태도, 그리고 상대의 선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나는 선택과도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은 특별한 선언이 없어도 반복되며 쌓여오고, 그 축적 속에서 그림은 점점 더 흐트러지지 않는 단단한 상태가 된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완성의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려지고 있는 현재의 시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두르지 않고, 모양을 재촉하지 않으며, 오늘의 선을 오늘의 마음으로 긋는 일. 그 과정에서 생기는 미세한 흔들림과 떨림을 지우지 않고서 그대로 남겨두는 선택. 그런 선택들이 겹겹이 쌓여 어느 날 문득 돌아보았을 때,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시간을 함께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훗날 이 도화지를 다시 펼쳐 보게 될 때, 그 안에 어떤 그림이 담겨 있든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 그림이 외부에서 덧칠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눈 시간과 감정, 침묵과 응답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 그림은 충분한 온기와 무게를 갖게 된다. 화려하지 않아도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쉽게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음에 머무는 그런 그림으로.
이렇게 쌓여 온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층위에서 계속 더해지며, 서로의 자리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고, 언젠가 완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의미가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아마도 우리가 만들어 온 것은 하나의 그림이라기보다, 시간이 지나도 천천히 빛을 드러내는 바탕 그 자체일 것이다. 그 위에 무엇이 더해지든, 혹은 잠시 멈추어 있든, 이미 쌓여 온 이 시간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많은 것을 함께 그려왔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