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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a Jul 28. 2021

안녕하세요. 저는 갤러리스트입니다.

 "안녕하세요." 첫 인사를 나눈다. "무슨 일 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나는 자랑스럽게 '갤러리스트(Gallerist)'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미술 유통 시장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직업에 대해 생소해한다. 이에 국내 미디어에서 흔히 소개된 '도슨트' 또는 '큐레이터'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마다 나는 갤러리스트가 미술 유통 시장에서 얼마나 생동감 넘치게 일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나 또한 갤러리스트라는 단어도 접해보지 못할 만큼 미술에 문외한이었다. 사실 나의 전공은 미술이 아닌 경제학이다. 정량적인 학문인 경제학, 인간의 감수성과 표현력이 극대화된 예술. 이 두 분야는 매우 극단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평소에 미술을 좋아했지만, 내 전공과 배경지식으로는 미술계에 뛰어들 수 없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학도 예술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선입견은 사라지고 용기를 갖게 되었다. 경제학적 관점을 예술 활동에 적용하는 학문인 '문화예술경제학'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후 주어진 환경 속에서 미술을 함께 엮어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70대 이상의 경로당 어르신들과 20대가 미술을 매개로 세대간 소통을 이루는 봉사 활동을 기획하기도 했고, 경제학의 통계 도구인 빅데이터를 활용해 경제상황에 따른 미술품의 가격 변화에 대해 연구해보기도 했다. 경제학이라는 다른 분야의 새로운 관점으로 미술에 접근하는 것이 나의 차별화된 강점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용기를 가지고 부딪혀보기 시작했다.


 내가 미술에 처음 매료된 장소는 미술관이었다. 2014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숨을 돌리러 들어간 피카소 미술관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느꼈다.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위대한 화가를 생각해보면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를 쉽게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직접 마주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그의 가치를 납득하기 어렵다. 나도 그랬다. 유명한 화가의 가치를 교과서 등을 통해 일방적으로 배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난생 처음 피카소의 명작들을 큰 전시 공간에서 오롯이 몰아보다보니, 명작의 아우라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 때의 강렬한 경험 이후, 나는 신이 나서 미술 전시와 관련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비록 작가가 당시 최악의 감정으로 작업한 작품일지라도, 그 작품으로부터 에너지를 느끼며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미술계에서 일하는 지금도 그 때와 마찬가지로 좋은 작품으로부터 느껴지는 아우라는 여전하다. 


 학부 졸업 후 사회에서의 활동을 고민해야하는 학부 3학년이 되었을 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잘하는지 등 나에 대한 의문이 샘솟았다. 결론은 "도무지 모르겠다"였다. 졸업까지 약 2년이 남은 시점에 조급한 마음이 들었고, 좋은 대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 필수로 요구되는 공인어학성적, 대외활동, 어학연수 등을 마구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활동에는 비용이 요구되는 만큼, 부모님께 어학원 학원비 등의 결제를 부탁드렸다. 이 때, 아버지는 내게 "너 토익 점수가 왜 필요한거니?"라고 되물으셨고,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토익 점수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회사 입사 지원을 할 것도 아니었고, 내가 원하는 대외활동에서는 토익 점수가 요구되지 않았다. 단지 주변에서 모두 토익 공부를 하고, 대학생이라면 높은 토익 점수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진 채, '남들이 하니까' 토익을 공부하려 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신 한마디였겠지만, 그 한 마디가 내겐 큰 전환점이 되었다. 물론 나는 토익 학원을 등록하지 않았고, 조급함에 남들이 하니까 무심코 따라하는 행동을 과감히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프랑스어를 하나도 구사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홀로 프랑스 파리 소재의 국립대로 교환학생을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2015년 가을에 떠난 프랑스 파리에서의 교환학생 생활은 대성공이었다. 나만의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스스로 '나'에게 익숙해진 나머지, 나에 대해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이를 위해 도전적인 환경에 놓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20여년간 몰랐던 낯선 나의 숨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샘솟았다. 이를 위해 대학생의 특권인 해외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잘 활용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대부분의 교환학생 지원자들이 1순위로 꼽는 영어권 국가는 과감하게 제외했다. 나의 교환학생의 목표는 언어가 아닌 '자아 탐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낯설고, 다양한 문화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국가와 학교 프로그램을 찾아보았고, 프랑스 파리의 한 국립대에 지원하게 되었다. 사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나에게 나홀로 파리 살기는 매우 큰 도전이었다. 파리로 떠나기 전 날까지 포기할까 많이 고민했고, 파리에 큰 테러가 있었던 직후라서 겁도 났다. 부모님도 공항 게이트에서 "언제든지 한국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말씀하시며,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보내셨다. 그러나 파리 샤를 드골 공항(Aéroport de Paris-Charles-de-Gaulle)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낯선 파리에서의 생존을 위해 그들의 흐름에 빠르게 따라가기 시작했다. 


 파리를 비롯한 유럽에 위치한 미술관, 옥션하우스, 갤러리, 아트페어에 열심히 다니다보니,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그들로부터 자기 직업에 대한 높은 프라이드를 느꼈고, 내가 행복을 느끼는 미술과 관련된 다양한 직업을 마주하니 나의 가슴이 웅장해졌다. 이러한 환경을 조성해준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없었다면,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지금의 꿈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내게 ‘미술 세계의 첫걸음’이었던 곳에서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하고자 국내 상업 갤러리에서 미술계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미술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해본 적이 없기에, 미술계에 직접 부딪혀가며 실무와 학문을 동시에 접하고 공부해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의 순수한 열정과 호기심은 아직까지 불타고 있고, 나름 경력직으로 실무 경험도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미술 생태계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고민하는 미션이 마음 속에 생겼고, 미술계에서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일들이 샘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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