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 버려진 화분
채우는 것과 비우는 것 사이의 어딘가에서 갈등이 일어난 지점은 늘 안타까운 과거와 미지의 미래였다. 왼쪽은 채움을 강요하고, 오른쪽은 비움을 권유한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은 모두 충족된다. 인생의 전체를 논할 때, 한쪽의 경험이 충족된 후에는 정 반대의 경험이 일어난다. 좋음과 나쁨을 분별하는 것은 자신 뿐이고, 모든 것은 그저 일어날 뿐이다.
모든 일들이 기막히게 타이밍 좋게 일어나 저절로 운을 실감하게 되는 것도, 일정이 꼬이고 다툼과 오해가 쌓여 한숨과 피로가 극심히 쌓이는 날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나 되지 않았나에 따른 분별이라면, 그저 일어나는 그대로 두고 우연성에 몸을 맡기고 나면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결 마음이 편해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지난 겨울밤 골목 앞 가로등 아래 실루엣으로 희미하게 드러난 화분은 그 줄기만큼은 꺾이지 않고 뻗어 있었다. 주홍빛으로 바랜 잎사귀도 떨어지지 않은 채 바람에 나부끼는 그 모습은 끝을 알 수 없는 생명력과 가녀린 사연을 머금고 있었다. 그저 찰나였지만, 손에는 다시금 연필이 들려있었다. 하고 싶었지만 못다 한, 표현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그것이 시작이었다. 내면의, 과거의 나와 다시 만나는 일. 동시에 일주일이고 열흘이 넘도록 눈물이 멈추지 않던 날들의 끝. 분별없이 그 속의 어떤 두려운 것이 있더라도 피하지 말자고 결심함과 동시에 다시금 메모를 하고 스케치를 시작하던 행위들. 그 모든 것들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는 것이 즐거웠던 날도 있었다. 선 하나만 그어도 설레고 먹고 자지 않아도 그 끝에는 창조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거기에 의미를 하나둘씩 찾기 시작하고, 짧지만 분명한 지적에 그 뿌리는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 그림은 질문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행복했던 순간 그림은 축복이었고 불행했던 순간 그림은 고행으로 다가왔다. 그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은 스스로에게 해야 했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숙제가 한꺼번에 밀려온 것이다. 많은 생각을 뒤로하고, 좁고도 깊은 그 길을 따라 올라갔다.